전쟁터에서 화려하게 치른 전투의 끄트머리, 나는 분명 승리자의 트로피를 손에 넣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내가 거처해야 할 육중한 성(城)은 어처구니없이 다른 이에게 빼앗기고 만 꼴이 되었다. 자본의 논리로 굴러가는 거대한 본사와의 재계약 실패. 그것은 달콤했던 스무 살의 첫 성취가 얼마나 쉽게 허물어질 수 있는 모래성 같은 것인지 내게 가르쳐 주었다. 어머니와 내 지문이 구석구석 묻어 있던, 깊은 애정을 쏟아부은 그 첫 가게를 떠나보낸 뒤, 나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평범한, 아니 어쩌면 조금은 비범한 이력을 가진 대학생의 자리로 돌아갔다.
당시 내 나이 스물둘. 창밖으로 건조한 가을바람이 쓸쓸하게 불어오던 계절이었다. 또래의 친구들은 이미 논산훈련소의 모래바람을 겪고 제대하여 빳빳한 복학을 준비할 나이에, 나는 아직 징집을 알리는 흔한 입대 영장조차 받지 못한 불투명한 미필자였다. 지난 2년간 심야의 편의점이라는 작고 밀폐된 세계에 내 청춘의 시간을 갈아 넣느라, 대한민국의 건강한 남성이라면 응당 져야 할 국방의 의무를 잠시 괄호 속에 묶어둔 대가였다.
"대체 군대는 언제쯤 가게 되는 걸까."
탁한 유리창 너머로 회색빛 하늘을 응시하며 막막한 고민의 담배 연기를 내뿜고 있을 즈음, 내 인생의 궤도에 예기치 못한 따스한 봄바람이 한 줄기 불어왔다. 지금의 아내이자 내 아이의 엄마가 된 그녀를 만난 것이다. 온 세상의 색채가 선명해지는 듯한 사랑에 빠진 청춘에게, 병무청의 묵직한 통지서를 마냥 기다리며 허비하는 시간은 견딜 수 없을 만큼 길고 지루했다. 나는 멋대로 던져두었던 휴학계의 마침표를 찍고 학교로 돌아가, 적어도 1~2년 정도는 부족했던 학업을 보충하며 그녀와의 찬란한 연애를 즐겨보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 달콤하고 평화로운 일상을 유지하려면,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연료, 즉 '총알'이 필요했다. 주말의 데이트 비용, 만만치 않은 학비, 그리고 적어도 남에게 아쉬운 소리는 하지 않을 내 알량한 자존심을 지켜줄 약간의 용돈. 나는 마치 담배에 불을 붙이듯 아주 습관적으로 구인 구직 애플리케이션을 켰다. 수백, 수천 개의 텍스트가 명멸하는 공고의 숲 속에서 내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은 건, 집 앞 오래된 아파트 단지의 낡은 상가 1층에 자리 잡고 있는 작은 **'세븐일레븐'**이었다.
제시된 조건은 무미건조한 최저시급. 내가 부점장 시절 포스기를 두드리며 만지던 그 짜릿한 매출의 맛에 비하면 한없이 가볍고 귀여운 액수였지만, '평일 오전 근무'라는 희소성 있는 조건이 당시 나의 빽빽한 대학 수업 스케줄과 마치 정교하게 세공된 퍼즐 조각처럼 오차 없이 딱 맞아떨어졌다. 나는 구겨지지 않은 빳빳한 이력서 한 장을 파일에 끼워 들고 그곳의 유리문을 밀고 들어갔다.
"어... 어서 오세요." 냉장고 모터가 돌아가는 웅웅거리는 소리 사이로, 힘없이 바스러지는 인사를 건네는 30대 후반의 사장님. 10평 남짓 될까 말까 한 좁은 매장은, 마치 햇빛을 오랫동안 보지 못한 식물처럼 어딘가 모르게 깊게 침울해 보였다. 나는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진행된 짧은 면접 자리에서, 내 이력을 아주 덤덤하고 무표정하게 읊어 내려갔다. "세븐일레븐 야간 전담으로 2년 했고요, 본사에서 주관하는 점주 교육도 정식으로 수료했습니다. 발주 넣는 것부터, 포스 정산, 창고 재고 관리까지 전반적인 시스템은 다 할 줄 압니다."
그 순간, 사장님의 탁한 동공이 미세한 진도 4.0의 지진처럼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그저 바코드나 찍을 최저시급 알바를 뽑으려 했는데, 본사의 점주 교육까지 마스터한 '고스펙' 인재가 제 발로 걸어 들어와 앉아 있으니 당황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비유하자면, 동네 조기축구회에서 주말에 뛸 용병을 구하는데 전직 국가대표 상비군 출신이 운동화를 신고 나타난 격이랄까. 그는 의심이 절반, 구원을 바라는 기대가 절반 섞인 복잡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채용을 결정했다.
그렇게, 좁은 아파트 상가에서 나의 기묘한 **'고스펙 알바 생활'**이 시작되었다.
근무 첫날, 카운터 안쪽에서 바라본 가게의 첫인상은 편의점이라기보단 차라리 '방치된 창고'에 가까웠다. 10평이라는 공간은 편의점이라는 생태계를 담아내기엔 턱없이 협소했다. 예비 물건을 넉넉히 쌓아둘 창고 공간도 없었고, 손님 두세 명만 들어와도 동선이 엉켜 숨이 막히는 답답한 구조였다. 하지만 진짜 치명적인 문제는 물리적인 평수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매장의 공기 곳곳에 무겁게 내려앉아 있는 짙은 무기력함이 훨씬 더 심각한 병폐였다.
진열대 가장 깊숙한 구석에는 솜사탕처럼 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아 있었고, 편의점 관리의 기본 중 기본인 선입선출(유통기한이 임박한 상품을 앞으로 빼는 작업)은 전혀 지켜지지 않은 채, 이미 유통기한을 한참 넘긴 스낵류가 구석에 우울하게 처박혀 있었다. 소위 업계에서 말하는 전형적인 '좀비 점포'. 주인이 애정과 관심을 완전히 거두어버린 낡은 가게 특유의, 미세한 곰팡이 냄새가 섞인 퀴퀴한 체취가 났다.
"하아..." 나도 모르게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럴 땐 그저 이어폰을 꽂고 시간을 때우며 바코드나 기계적으로 찍고 약속된 돈만 받아 가면 그만일 텐데, 내 몸속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점주의 DNA'가 가만히 있질 못하고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지난 2년간 엄마와 가게를 운영하며, 숱한 종류의 불량한 알바생들을 겪어보았다. 카운터 의자에 기대어 온종일 핸드폰 자판만 두드리고, 손님이 들어와도 눈길 한번 주지 않던 그 무심한 '월급 도둑'들. 그들을 보며 나는 늘 다짐했었다. '내가 나중에 남의 밑에서 일하게 되더라도, 절대로 저런 무성의한 직원은 되지 말아야지.'
그때부터 나는 10평의 공간 안에서, 사장님이 굳이 시키지도 않은 일들을 조용히 벌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손에 걸레를 들고 덤벼든 건 **'악성 재고'**와의 전쟁이었다. 도무지 팔릴 기미가 보이지 않아 선반의 소중한 자리만 축내고 있는 물건들을 모조리 골라냈다. 색이 바래버린 플라스틱 장난감, 유행이 한참 지나버린 캐릭터 상품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뜬 사장님께 건의해 매대 한 칸을 완전히 비우고, A4 용지에 매직으로 글씨를 써서 '파격 할인' 코너를 급조했다. "사장님, 이거 어차피 1년을 둬도 안 팔려요. 반값, 아니 삼 분의 일 가격에라도 털어내서 단돈 만 원이라도 현금화하시죠. 공간이 돈입니다." 나는 회색 먼지 구덩이였던 진열장을 다 들어내고 뜨거운 물을 적신 걸레로 바닥을 닦아냈다. 컵라면 국물 자국이 화석처럼 눌어붙은 시식대 유리를 닦아내고, 뒤죽박죽이던 냉장고 속 음료수들의 오와 열을 칼같이 맞췄다.
11월의 서늘한 날씨에도 이마에 땀을 뻘뻘 흘리며 진열대를 뒤집어엎고 있는 나를 보며, 사장님은 어이없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학생, 아니... 점장님이라고 불러야 하나? 적당히 좀 해. 내가 시급을 더 얹어 주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사서 고생이야." "그냥, 제가 카운터에 서 있는데 지저분한 게 답답해서 그래요. 매장이 깨끗해야 지나가던 손님도 한 번 더 들어오죠."
나는 신분상 분명 알바생이었지만, 머릿속의 마인드와 심장 박동은 여전히 책임감 있는 점주였다. 사장님이 귀찮다며 대충 넣은 발주가 엉망이 되어 꼭 필요한 물건이 펑크가 나면 오히려 내가 더 스트레스를 받아 입술을 깨물었고, 화려한 패키지의 신상품이 들어오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매장에서 가장 손이 잘 가는 황금 구역, 골든존(Golden Zone)에 보기 좋게 배치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칙칙하고 냄새나는 창고 같았던 가게가 제법 반질반질 윤이 나고 조명 빛을 튕겨내는 '진짜 편의점'다운 모양새로 변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