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 일기] 편의점의 고장 나지 않는 시계들

by 편알못가이드

편의점의 시간은 바깥세상과는 조금 다른 농도로 흐른다. 냉장고 쇼케이스의 모터가 낮고 규칙적인 웅웅거림을 뱉어내는 동안, 이곳의 시간은 시곗바늘이 아닌 사람들의 방문으로 분절된다. 그들은 마치 정교하게 세공된 스위스제 시계의 톱니바퀴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약속된 시간에 자동문 버튼을 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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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2시, 희미한 튀김 기름 냄새를 묻히고 들어오는 치킨집 아저씨. 그가 주문하는 것은 언제나 타임 미드 두 갑이다. 오후 4시, 2층 아주머니의 몫은 던힐 1미리 한 갑. 그녀의 발소리에는 특유의 건조한 리듬이 있다. 도시가 깊게 잠든 새벽 3시, 104동 아저씨는 잠이 덜 깬 얼굴로 출근하면서 말없이 뜨거운 캔커피의 온기를 거친 손바닥으로 느끼며 껌 한 통을 집어 든다. 그리고 여명이 스며들기 시작하는 새벽 5시, 관리실 아저씨가 서늘한 생수 한 병과 에쎄 프라임으로 하루의 시작을 선언한다.


지루할 정도로 반복되는 매일의 일상이다. 하지만 나는 포스기 너머로 그들을 바라보며, 태엽이 단단히 감긴 채 결코 고장 나지 않는 시계들을 떠올린다. 그들은 매일 같은 시간에 와서 같은 물건을 고르고, 날씨나 어제의 야구 결과 같은 건조하지만 필수적인 짧은 안부를 나눈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들의 방문 시간에 맞춰 내 하루의 질량과 부피가 정해지는 기분마저 든다. 그분들이 다녀가야 '아, 지금쯤 텅 빈 매대 하나를 채워야 할 타이밍이구나', '이제 슬슬 교대할 준비를 해야겠네' 하고 무의식적으로 가늠하게 되는 것이다. 그 손님들이 제시간에 나타나 무사히 자신의 물건을 사 가야만, 비로소 편의점이라는 이 작은 우주가 아무 탈 없이 궤도를 돌고 있다는 기묘한 안도감이 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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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른 일로 잠시 매장을 비우고 다른 근무자가 이 공간을 지킬 때도, 그들의 존재감은 조금도 옅어지지 않는다.


"어제 어떤 손님이 사장님 찾으시던데요?"

"104동 아저씨? 따뜻한 커피랑 껌 사 가시는 분?"

혹은 "아, 타임 미드 두 갑 사 가는 아저씨?"


우리는 서로의 이름도, 나이도, 살아온 이력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매일 사 가는 물건의 바코드는 곧 그들의 이름표가 되고, 고유한 정체성이 된다. 그 결코 흐트러지지 않는 완벽한 루틴 덕분에, 나는 그들을 누구보다 선명하고 입체적으로 기억할 수 있다.


하루에도 수백 명의 사람들이 썰물처럼 밀려왔다 빠져나가는 편의점. 그 익명성의 바다 속에서도, 유독 내가 근무하는 시간에만 마주치는 손님들과는 설명하기 힘든 끈끈한 연대가 형성된다. 그렇기에 늘 오던 시간에 그 익숙한 얼굴이 보이지 않으면, 내 마음속에서는 덜컥 톱니바퀴 하나가 빠져버린 듯한 알 수 없는 상실감이 피어오른다. '어디 편찮으신 건 아닐까?', '갑자기 이 동네를 떠나버린 걸까?' 하는 온갖 상상 속에서, 완벽했던 하루의 리듬은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한다. 그것은 Metallica의 Master of puppets에서 가장 좋아하는 기타 솔로 구간이 통째로 날아가 버린 듯한 공허함이다.


하지만 다음 날이면 그들은 머쓱한 표정으로 다시 자동문을 열고 들어온다. "어제는 일이 있어서 하루 쉬었어"라며, 세상의 끝 같은 건 오지 않았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그제야 내 마음속에 위태롭게 멈춰있던 시계의 추도 다시 째깍이며 일정한 진폭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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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이의 정이 좋아서, 그 희미한 관계가 주는 온기 때문에 편의점을 하고 있다는 내 말이 어떤 느낌인지 이제 조금은 알 수 있을까. 우리는 그저 바코드에 찍힌 숫자를 교환하는 곳이지만, 결국 내가 매일 새벽의 형광등 아래서 기다리는 건 그 물건을 사 가는 '사람'들의 고독하고도 성실한 궤적이더라고. 오늘도 내 편의점의 시계들은 각자의 고단한 시간을 안고 정확하게 문을 열고 들어올 것이다. 그 변함없는 발걸음들을 기다리며, 나는 오늘도 조용히 음악을 틀어두고 기분 좋게 포스기 앞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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