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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슴도치 Jul 21. 2023

[줄거리 해석]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1)

무의미성의 진리가 지배하는 세계

저자 룰루 밀러의 이야기는 창세기의 도입부처럼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곳에서 시작된다. 진리의 나침반이 혼돈만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너무 일찍 알게 돼버렸던 그녀는 막 책을 펼쳐든 독자들에게 이 폭력적인 진리부터 마주하게 한다.


인생에 의미는 없어. 신도 없어. 내세도, 운명도, 어떤 계획도 없어. 진실은 이 모든 것도, 너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란다. 너한테는 네가 아무리 특별하게 느껴지더라도 너는 한 마리 개미와 전혀 다를 게 없어. 아니 어쩌면 지구에게 넌 개미 한 마리보다 덜 중요한 존재라고도 할 수 있지. 너는 토양 속에서 환기를 시키거나, 목재를 갉아먹어 분해의 속도를 높이지 못하니까.
(pp.54-55를 패러페러이즈paraphrase함.)


위 인용문은 인생의 의미를 묻던 어린 밀러에게 아버지가 제공한 답이다. 생의 무의미함을 직시하는 데서 행복과 자유가 온다고 믿었던 아버지의 진리관은 밀러에게 역효과를 낳았다. 음주난동을 벌이던 아버지, 학교폭력 피해자인 친언니, 가정의 절망적인 분위기로 울음을 터뜨리는 어머니와 살던 밀러는 친언니처럼 학교폭력을 당하며 자랐다. 이런 그녀에게 '너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무의미성의 진리는 그녀를 더욱 상처 입히는 것이었을 테다. 어디에도 편히 발 뻗을 곳 없던 밀러가 만사를 해결해 줄 도구인 총을 떠올리는 건 이때부터가 아니었을까 싶다.


대학에 들어가서 그녀는 어떤 을 발견한다. 어깨가 넓고 엉뚱하고 괴짜 같은 곱슬머리 남자. 밀러는 절대 없을 것만 같았던 안식처를 발견하게 되었다고 쓴다. (이것은 나중에 그녀가 혼돈의 세계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다른 세계, 다른 진리의 빛을 미리 암시하는 것인데 이 책에 대한 세 번째 포스팅에서 자세히 논할 예정이다.) 그러나 어느 늦은 밤, 낯선 금발 소녀와 성관계를 가지게 된 사건으로 그녀는 곱슬머리 남자를 영영 잃어버렸다. 다시금 혼돈이 자욱하게 그녀의 인생을 뒤덮게 된 것이다.


그러던 그녀는 스탠퍼드 대학의 초대 총장이자 어류를 사랑했던 괴짜 분류학자 데이비드 스타 조던을 알게 된다. 그녀는 데이비드의 삶이 보통 사람보다 몇 배나 큰 혼돈에 의해 끊임없이 위협받았으나 그가 결코 포기하거나 절망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크게 고무되었고, 그의 전기로부터 혼돈과 무의미가 지배하는 삶을 살아갈 방법을 모색하게 된다.

데이비드는 수십 년을 다양한 어류를 포획하고 그것들에 이름을 붙이는 연구를 하며 살았다. 그는 물고기의 해부학적 구조를 들여다봄으로써 인간이 되는 데 필요한 생명의 실험들을 알아낼 수 있고 이는 잠재적으로 인류가 더욱더 진보하도록 도와줄 실마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1883년 7월 벼락이 전신선을 때려 그의 연구실에 불이 났고 모든 물고기들과 그의 문서들이 소실되었다. 한 기자는 《블루밍턴 텔레폰지》에서 이 참상을 "한 시간 동안 타오른 불길이 그가 평생 해온 일을 거의 다 수포로 돌려놓"은 사건이라고 썼다. 그로부터 겨우 2년 뒤 그는 아내 수전과 사별했다. 가장 친밀한 동료인 허버트와 제자들도 죽었고 1900년에는 데이비드가 가장 총애하는 자식이자 분류학을 사랑했던 아이 바버라가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가장 큰 혼돈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6년 뒤인 1906년 7.9 규모의 지진이 샌프란시스코를 공격했고, 데이비드가 이룩한 30년 간의 연구와 삶이 한순간에 수포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 모든 비극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 불운하지만 경이로운 작자는 아직 살아있는 물고기 표본의 목에 바늘을 찔러 넣고 이름표를 꿰매 넣으며 분류학자로서의 소명을 이어갔다. 차근차근 기억나는 대로 하나씩...! 그리고는 표본을 하나라도 살리기 위해 에탄올을 요청하고 낮이나 밤이나 호스로 물고기들의 살덩이에 물을 뿌렸다. 밀러는 알고 싶었다. 이 모든 일의 허망함에 짓눌려 으스러지지 않기 위해, 자신에게 계속 박차를 가하는 데 어떤 원동력이 있었던 것인가. 왜 나는 곱슬머리 남자를 잊지 못하는 것인가. 어떻게 해야 다시 나아갈 수 있는 것인가.


절박했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책에서, 망해버린 사명을 계속 밀고 나아가는 일을 정당화하는 그 정확한 문장을 찾아내는 것이 절박했다.(p.120)




다음 포스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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