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의 이면, 인간의 의지와 우생학을 변호하다
지난 글에 이어 포스팅하는 글입니다. 아래 글부터 읽어주시길!
https://brunch.co.kr/@cw40601/3
밀러는 혼돈과 무의미가 통치하는 세상과 싸워나가는 방법을 찾기 위해 50권이 넘는 책과 수백 가지에 이르는 데이비드의 텍스트를 일일이 검토했다. 그러나 그는 갈수록 그녀의 아버지와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닌가. "인간은 무의미하고 자연은 인간의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자연에 참견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자연의 법칙은 바꿀 수 없으며 그 법칙을 거스르는 자는 공기로 된 방망이를 휘두르는 셈이다"(p.125). 하지만 무심함을 넘어 무자비하기까지 한 자연 아래서 살아나가는 방법을 찾아야만 했던 밀러는 지진으로 죽어가는 물고기의 목에 바늘을 찔러 넣고 이름표를 꿰매 넣던 데이비드처럼 포기하지 않았다. 기어코 그녀는 데이비드의 개인적인 에세이 "Life's enthusiasms"에서 문제 해결의 열쇠가 될 만한 글귀를 발견한다. 이는 1906년, 그러니까 샌프란시스코 지진이 일어났던 해에 출간된 것으로 데이비드가 지진으로 인한 피해 규모를 조사하는 데 애쓰고 있을 때 쓰였다.
사람이 계획을 세우고 창조하기 시작한 이래, 사람이 노력해서 이룬 결과가 그토록 처참하게 파괴된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평범한 한 남자가 자기 자신에게 그토록 희망차고, 그토록 용감하며, 그토록 자신과 자신의 미래를 확신하는 모습을 보여 준 일도 그전엔 결코 없었다.
왜냐하면 결국 살아남는 것은 사람이고, 운명의 형태를 만드는 것도 사람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결코 흔들리지 않으며 불에 타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 그 지진과 화재가 준 교훈이다. 그가 지은 집은 무너지기 쉬운 카드로 지은 집이지만, 그는 집 밖에 서 있고 다시 집을 지을 수 있다. 위대한 도시를 건설하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그보다 더 경이로운 일은 도시가 되는 것이다. 도시란 사람들로 이루어지며, 사람은 영원히 자신이 창조한 것들보다 높이 올라가야 한다. 사람의 내면에 있는 것은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일보다 더 위대하다. (pp.132-133의 논지를 명료하게 재구성함.)
밀러는 이를 경이롭고 분발을 요구하는 투쟁의 권유, 영광스러운 위로라고 찬양하면서도 결국 이것은 거짓말에 불과한 것이 아니냐고 비판한다. 그녀가 보기에 "운명의 형태를 만드는 것은 사람의 의지"라는 말은 데이비드가 자기 자신에게 결코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던 종류의 거짓말이다. "자연은 인간의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라고 단언했던 그가 아니었는가? 데이비드조차도 절망에 완전히 집여 삼켜지지 않으려면 거짓말이 진실이기를 믿어야만 했던 것이다!
여기서 잠깐, 글의 매끄러운 흐름을 방해할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나는 사람의 의지가 운명의 형태를 만든다는 데이비드의 주장을 자기기만으로 보는 밀러의 해석에 동의할 수 없음을 밝혀야겠다. 비록 데이비드의 모든 텍스트를 살펴보지 못했지만 적어도 이 책에서 그녀가 데이비드의 주장에 대해 모순이라고 지적하는 것은 타당해보이지 않는다. 밀러는 "자연이 인간의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는 것과 "운명의 형태를 만드는 것은 사람의 의지"라는 두 명제가 모순되는 것이라고 본다. 후자를 아주 강하게 해석해서 "운명의 형태를 만드는 것은 사람의 의지뿐이라고 본다면 두 명제는 모순된다. 그러나 데이비드는 '뿐'이라는 보조사를 사용하지 않았기에 두 명제는 충분히 양립가능하다. 자연은 인간의 사정을 봐주지 않고 운명의 형태에 개입할 수 있지만 자연만이 인간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도 운명의 형태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예시를 들어보겠다. 사람에게는 자유의지가 있고 이를 토대로 데이비드가 말했듯 "위대한 도시를 건설"함으로 운명의 형태를 만들 수 있다. 폼페이 화산 폭발, 노아 시대의 대홍수 등 자연재해가 도시를 폐허로 만들어 간간이 운명에 크게 개입할 수 있겠지만 자유의지는 전혀 훼손되지 않는다. 언제건 인간은 다시 도시를 건설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과학기술이 매우 발달한 오늘날에는 거꾸로 인간이 자연의 운명에 개입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도 가능하다. 극단적이지만 핵보유국가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핵폭탄 버튼을 누르는 상황을 가정해보자. 자연이 인간의 사정을 봐주지 않고 운명의 형태를 바꿀 수 있듯, 인간도 자연의 사정을 봐주지 않고 그것의 운명을 바꿔버릴 수 있는 것이다. (이 논의의 기저에는 인간이 자연으로 환원될 수 있는 존재이냐 아니면 자연 이상의 존재, 즉 자유로운 존재인가하는 유서 깊은 철학적 주제가 깔려있다. 짧게는 근대지만 멀게는 고대 그리스 때부터 논의된 주제라고 얘기될 수 있다. 고대 희랍 철학에는 자연physis과 법nomos의 이분법적 대립이 있었다. nomos는 좁은 의미로는 법, 규칙이지만 넓은 의미로는 인간이 만들어내는 인위를 뜻하는 것으로 도시, 문명을 가리킬 수도 있다. 데이비드가 인간이 자신의 의지로 운명의 형태를 만들 수 있는 예시로 도시를 논한 것은 그런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데이비드가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지 않았다면 밀러의 해석에 동의할 수 있겠으나 위에 적어둔 132-133쪽 인용구를 보면 데이비드는 자유의지를 인정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고, 그렇다면 데이비드가 제시한 두 명제는 조화롭게 양립가능하다.
누군가는 밀러의 비판을 느슨하게 이해할 수 있지 않느냐고 지적할 수 있겠다. 밀러가 문제 삼는 데이비드의 두 명제를 "자연은 인간의 운명에 개입하여 그 형태를 크게 변형시킨다."와 "인간은 의지를 가지고 무언가를 해낼 수 있지만 자연에 의해 언제건 파괴될 수 있기에 운명의 형태를 결정짓는 요소라고 말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로 이해할 수 있다는 거다. 이런 해석이 불가능하다고 얘기할 수는 없겠으나 책에서 그녀가 데이비드에 대해 '자기기만', '거짓말'이라고 주장한 부분을 읽어보면 이는 아주 관대한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십보 양보하여 이 해석을 수용한다 해도 두 명제는 여전히 모순관계가 아니라는 점에서 그녀가 이를 근거로 데이비드를 거짓말쟁이로 규정하는 것은 부당하다. (그리고 애초에 여기서 인간의 운명을 파괴하는 것으로 그려지는 자연은 일반적인 자연법칙이 아니라 자연재해다. 안타깝게 데이비드는 화재와 지진로 큰 피해를 두 번 입었지만 늘 발휘되고 있는 인간의 의지에 비하면 이는 얼마나 예외적인 일인가. 빈도를 고려하면 인간의 운명의 형태를 결정짓는 것은 인간의 의지로 보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운나쁘게 한 번 자연재해가 터지면 삶과 운명에 아주 큰 영향을 주기는 하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런 문제에도 그녀의 책이 가지는 매력과 가치가 줄어들지는 않는다. 이 책은 철학 서적이 아니라 데이비드의 전기에 밀러의 자전적 에세이를 버무려 '상실, 사랑 그리고 숨어 있는 삶의 질서'를 이야기하는 문학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아무튼 데이비드가 모순을 범하고 있다고 지적함으로써 7장을 마무리한 밀러는 다음 장에서 기만을 주제로 다룬다. 기만에 대한 도덕적 판단은 유보하고 이것이 위험한 것인지, 인간 심리를 위해 유용한 것일 수는 없는지를 따진다. 그녀는 20세기 임상심리학자들의 연구 결과들을 소개하며 자기기만이 유용할 수 있다고 밝힌다. 동시에 자신에게 불리한 비판을 무시할 뿐 아니라 때로는 비판을 가하는 자를 협박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을 택하는 데이비드의 자기기만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넌지시 비추기도 한다. 그에 대한 비판적인 논조는 뒤로 갈수록 강화된다. 9장에서는 데이비드에게 가장 눈엣가시였던 스탠퍼드 대학의 설립자 제인 스탠퍼드의 사망 배후에 데이비드가 있었을 것이라는 합리적인 추측을 내놓고, 10장에서는 그가 우생학의 유행에 기여한 바에 대해 논한다. 9장의 이야기는 본 포스팅에서 다루는 것이 독자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한 밀러의 스토리텔링을 자칫 건조하게 만들어 그 재미를 반감시킬 것 같아 건너뛰겠다.
10장에서 데이비드는 우생학자, 장애인혐오자로 소개된다. 그는 물고기 수집 여행을 다니는 동안 우연히 이탈리아 알프스의 아오스타 마을에 다녀왔다. 아오스타는 각종 장애를 지닌 사람들을 보호하는 안식처로 사회에서 무능력자 취급을 받던 사람들이 이곳에서는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데이비드는 이곳을 "거위보다 지능이 낮고 돼지보다 품위가 떨어지는 피조물들이 들끓는 진정한 공포의 공간"으로 묘사했다. 마을을 떠나고 몇 년이 지나도 데이비드의 마음은 계속 불편했다. 그는 멍게나 따개비 같은 생물들이 기생으로 자원을 획득해 온 결과 더 게으르고 약하고 단순하며 지능이 떨어지는 생명체로 퇴화했다는 믿음을 가지고 이를 인간에게도 그대로 적용했다. (멍게나 따개비에 대한 믿음은 나중에 잘못된 믿음으로 밝혀지는데 다음 포스팅에서 다룰 예정이다.) 그는 아오스타 사람들이 퇴화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퇴화할 것이라 믿고 인류의 쇠퇴를 예방할 유일한 방법은 백치들을 몰살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를 비롯한 초기 우생학자들이 비슷한 말을 하고 다닌 이후로 미국의 뒷골목에서는 부적합자들이 생존하지 못하도록 장애인들을 대상으로 강제 불임화 시술이 이루어졌다.
매디슨 그랜트라는 한 미국 남자는 히틀러가 자신의 성경으로 여기다시피 한 《위대한 인종의 소멸》이라는 책을 쓰고 전국의 모든 도덕적으로 비뚤어진 자, 정신적 결함자, 유전적 불구자들을 자선의 명목으로 한데 불임화하자고 주장했다고 한다. 열성적인 우생학자이자 '버지니아주 간질환자 및 정신박약자 수용소'의 책임자였던 앨버트 프리디는 "남자한테 미쳤다"는 이유로, "방랑벽"이 있다는 이유로, "상스러운 이야기"를 했다는 이유로, 심지어 수업시간에 쪽지를 주고받았다는 이유로 여자들을 불임화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이와 관련해 여러 번 고소를 당했지만 승소했는데 특히 캐리 벅이라는 수용소에 있던 한 여자와의 연방대법원 재판에서 승소함으로 강제 불임화를 법률로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는 미국 전역에서 공공복지라는 명목으로 6만 건 이상의 불임화가 합법적으로 당사자의 의지와 상관없이 실행되도록 만들었다. 2007년 미시건대학의 역사학자 스턴은 연구팀과 함께 캘리포니아에 있었던 불임화 수술 기록부를 분석했는데 "부적합자"로 여겨진 사람은 장애인뿐만 아니라 "성적으로 문란하다고 판단된 젊은 여자들, 멕시코와 이탈리아, 일본 이민자의 아들과 딸들 그리고 성적인 전형에서 벗어난 남녀들"이었다고 한다.
신실한 청교도로 알려진 데이비드는 법을 어기는 것을 싫어했기에 불법이었던 불임화 수술을 직접 진행하지는 않았기에 열거한 일련의 부조리에 전적인 책임을 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초기 우생학자로서 불법이었던 우생학적 불임화의 합법화를 위해 힘썼고, 그로 인해 은밀한 불임화 시술이 진행되고 끝내 합법화가 이루어지도록 하는데 이바지했다고 볼 수 있기에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고 판단된다.
다음 포스팅에서 이어집니다.
아마 다음이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와 관련된 마지막 포스팅일 듯합니다.
제목은 [줄거리 해석]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3): 이 세계 안의 "다른 세계"를 향해서로 생각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