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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슴도치 Jul 26. 2023

오은영 박사와 교권 추락

정말 오은영 박사의 책임일까?

https://n.news.naver.com/article/025/0003296461


결국 오은영 박사가 해명문 비슷한 입장문을 냈다. 오 박사는 세 가지 비판에 답함으로써 (그녀의 표현대로라면) '오해'를 바로잡으려고 시도했다.


비판1. '금쪽같은 내새끼'는 몇 차례 상담이나 교육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 아동을 해결할 수 있다는 식의 환상을 만들어낸다.


답1. '금쪽같은 내새끼'는 치료가 아닌 방향을 제시하는 프로그램으로 인간 개조 프로그램이 아니다. 육아의 길을 잃은 부모가 문제를 공개하고, 문제의 원인과 이유에 대해 같이 의논해 앞으로의 육아 방향에 관해 이야기하는 프로그램이다. 단기간의 상담과 교육만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약물치료, 전문의, 입원치료를 권해왔다.


비판2. 아이를 이해하려고만 한다. '체벌 없는 훈육' 때문에 교권이 추락했다.


답2. 체벌에 반대한 것이지 평생 훈육을 강조해왔다. 2005년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에서도 가장 중요시한 게 훈육이다. '(아이를) 이해해보자'라는 말의 의미는 "아이(의 문제를)를 알아보고, 부모 자신(의 문제)을 알아차려 보고, 아이의 어려움을 알아가보자는 뜻"이라며 "우쭈쭈 다 들어주고, 다 허용하라는 것이 절대 아니다".


비판3. "교장실을 찾아가서 따져라, 교사에게 조심하겠다는 말을 들어라"라는 내용을 책에 썼다. 이로 인해 교사에게 많은 부담이 가해지고 교권이 추락했다. 전문가로서 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답3. "책은 글쓴이의 의견을 전달하는 장이다. 줄과 줄 사이, 단락마다 함축된 의미가 담겨 있다. 논란이 된 챕터는 총 7페이지, 줄로는 122줄이다. 온라인상에 유포된 내용은 고작 10줄 정도다. 글은 앞뒤 맥락을 봐야 의도를 알 수 있는데 다 자르고 단편적인 부분만 내놓으면 잘못 이해되기 쉽다."


여기까지가 기사 내용 요약문이고 지금부터는 내 생각을 적어보려 한다.


비판 1에 대한 답은 트집 잡을 부분이 없어 보인다. 비판 2에 대한 답은 '훈육을 강조한 건 잘 알겠는데 어쨌든 당신의 "체벌 없는" 훈육론이 교권을 추락시켰다는 사실은 변함없다.'는 추가 반박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런데 이 주장에 대해서는 엄밀한 분석이 필요해 보인다. 교권 추락의 원인은 복합적인데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것 중 하나는 교육 현장에서 문제 학생을 지도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한 학생이 다른 학생을 때릴 때 교사가 어떠한 물리적 제재도 가할 수 없다는 사실, 수업시간에 떠드는 학생들을 효과적으로 제지할 방법이 없다는 것 등이 예시로서 자주 거론된다. 폭력을 말리기 위해 학생의 손목을 잡거나 수업시간에 떠드는 학생을 조용히 시키는 과정에서 아동 학대로 신고받는 경우가 드물지 않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체벌이 필요한 것일까? (체벌이 도덕적으로 바람직한가에 대한 판단은 여기서는 유보한다.) 주변 교사들이나 교사 커뮤니티를 보면 체벌 부활에 대한 목소리는 크지 않다. 이는 체벌이 해결방안이 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실효성 있는 훈육방법이며 내가 생각하기에도 위에서 논한 문제들은 체벌 없이 효과적인 훈육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을 갖추는 것으로 해소될 수 있을 것 같다. 백 번 천 번 양보해서 체벌 없는 훈육으로 교권이 추락했다고 하더라도 체벌 금지를 주장한 '오은영 박사의 주장'에 힘입어 체벌이 폐지되고 교권이 추락하게 된 것일까? 교육부, 청이 심리상담전문가인 오 박사의 말에 좌지우지되는 곳인가? 이를 고려하면 비판 2로 그녀를 공격하는 것도 부당하다.


비판 3은 교육자들이 가장 유효한 비판으로 삼을 만한 부분으로 판단된다. 오은영 박사의 주장처럼 책은 줄과 줄 사이, 단락마다 함축된 의미가 담겨 있어 맥락을 고려하는 것이 중요한데 온라인상에 유포된 내용은 고작 10줄 정도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런 대답은 앞의 두 가지 비판들에 대한 답에 비해 헐거워 보인다. 일단 너무 원론적인 대답이다. 또 해당 챕터를 직접 읽어봤는데 여전히 교사들이 분개할 만한 지점들이 다분해 보인다. 실제로 담고자 한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소아청소년 정신문제 전문가로서의 입장을 감안하더라도 그녀가 약하게 말하자면 오독의 소지가 큰 주장을 강하게  것이 아닌지, 강하게 말하자면 학교 현장에 대한 충분한 고려 없이 다소 경솔한 주장을 펼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오 박사의 책에 대한 '나'의 해석이므로 내가 그녀가 전달하고자 한 진짜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을 수 있다. 비슷한 주장을 한 사람으로 해석의 문제에 천착했던 (전통적) 해석학의 선구자 슐라이어마허가 있다. 그는 이해Verstehen가 저자와의 동일화, "저자의 생각을 우선 정확하게 이해한 다음 저자에게 무의식적으로 남아 있는 내용까지 의식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라고 주장했(김창래, 2008). 그의 입장을 충실히 따르면 오은영 박사가 비판 3에 구속될 소지는 크게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저자와의 동일화는 너무 이상적인 목표실현불가능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를 의식했던 후대의 해석학자 하이데거는 모든 해석은 본질적으로 폭력이라고 말했고, 하이데거의 제자인 철학적 해석학자 가다머는 "모든 해석자는 하나의 텍스트를 각자의 상황에 따라 새롭게, 그리고 달리 이해해야 하는 자유를 결코 거부할 수 없다"라고 주장했다(김창래, 위와 동일). 그들의 해석학 저자의 의도를 철저하게 읽어낼 것을 구하는 전통적 해석학자들의 입장을 부인하는 수준을 넘어다. 들이 보기에 저자와의 동일화는 애당초 불가능한 것이며 해석은 저자와의 불가피 다름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전통적 해석학과 철학적 해석학의 차이는 극명하게 대조되고 있지만 실제로 둘의 간극은 크지 않을 수 있다. 관련해서는 김창래 교수의 논문, "나은 이해 또는 다른 이해? - 하나의 해석학을 위하여 -"을 참조할 것.) 후자의 입장에 기대어 얘기하자면 내 해석 오영 박사의 진짜 의도와는 다른 것일 수 있지만 그녀의 텍스트에 대해 잘못된 해석을 한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혹자는 여기서 가다머의 입장을 따르면 해석의 옳고 그름에 대한 기준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냐는 반박을 제기할 수 있다. 이러한 비판들이 철학적 해석학자들에게 가해져 왔지만 그들이 해석의 타당성의 기준을 부정한다고 하기는 어렵다. 철학적 해석학의 타당성의 기준에 대해서도 김창래의 동일한 논문을 참조할 것.) 나의 해석이 타당한 것이라면 녀가 비판 3으로부터 아직은 자유로울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왜 그런가?


일단 해석학에 대한 잠깐의 논의를 통해 봤듯 해석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며, 저자가 자신의 저작물이 초래할 수 있는 해석들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지의 문제는 더 복잡한 주제라는 사실부터 밝혀둔다. 여기서 이 문제를 정치하게 다루기는 어렵겠지만 내 입장을 간단히 말하자면 나는 그녀가 비판 3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철학적 해석학이 제아무리 다른 해석들의 가능성을 인정한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해석은 텍스트에 대한 문자적literal (문자주의literalism아니다!) 이해로부터 발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다머에 따르면 해석자(현재 지평)는 저자를 비롯해 그것으로부터 이어져오는 기존의 여러 해석들의 전승(과거 지평)과 지평 융합Horizontverschmelzung을 이루는 것이다. 오은영 박사의 글에 대한 나 같은 류의 이해는 예전-기zuvor-dort의 그녀가 쓴 텍스트라는 과거 지평과 지금-여기jetzt-hier의 해석자인 '우리'라는 현재 지평이 융합을 이루어서 만들어 것이다. 해석에 대한 저자의 책임은 예전과 지금, 거기와 여기 사이의 시공간적 간극이 어느 정도인지 그리고 저자와 해석자 사이에 위치한 기존 해석들의 전승이 어떠한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책임의 정량화는 불가능하겠지만 오 박사의 글은 2022년에 출판된 것이고 전승되어 오는 기존 해석들이 만무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녀가 져야 할 책임이 가볍지는 않겠다는 결론을 내 수 있는 듯하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사항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실제적 영향력이다. 정말로 학부모들이 박사의 글을 읽어서 교권이 추락하고 교사에게 많은 부담이 가해졌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녀의 글이 지니는 영향력이 큰가 하는 것이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요즘 책 읽는 사람이 얼마나 되냐... 연구물들로 이를 뒷받침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이에 대한 탐구는 전무한 상황이다. 학부모와 교사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하거나 심층 인터뷰를 하는 등 연구를 해봐야 사태의 진상을 정확히 확인해 볼 수 있겠지만 아무리 생각하고 교사들에게 의견을 물어봐도 (가족을 비롯해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교사로 일하고 있다. 이들의 힘을 빌려 여러 사람에게 의견을 물어보았다.) 오은영 박사의 글은 큰 영향력이 없으며 그녀 때문에 교사들이 괴로워진 것은 아니라고 판단된다. 

이때 누군가는 내가 실질적인 근거 없이 오 박사를 비판 3으로부터 면책시키려 한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교사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는 점을 입증하는 쪽이 아니라 그것에 대해 반박하는 측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녀가 교권 추락에 얼마나 영향력이 있는가에 대한 근거를 내세워야 할 쪽은 내가 아니라 오은영 박사를 비판하는 이들이다. 입증 책임은 원고에게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러므로 녀의 글이 영향력이 크다는 사실이 입증되지 않는다면 (더 나아가 내 생각처럼 실상 영향력이 작다면) 비판 3의 효력은 (아주) 크게 상실될 것이. 비판 3을 수정해서 문가인 그녀가 쓴 글이 교사를 괴롭게 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녀가 이를 합당하게 예견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서 비판받을 만하다고 주장한다면 여기에는 쉽게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비판 3의 요지는 녀의 로 인해 제로 교사가 괴로워졌 것다. 비판 3을 주장하는 이들이 이를 입증해내지 못하는 이상 비판 3도 다른 비판들처럼 력해지고 만. 내 제안대로 비판 3을 재구성하면 그녀가 받을 비판의 수준은 지금에 비해 훨씬 사소하고 미미해질 테다.


정리하자면 비판 1, 2에 대해서는 비판받을 여지가 없어 보이고 비판 3은 대폭 수정되지 않는 이상 이전 비판들과 마찬가지로 유효하지 않다. 만약 정된다면 그녀에게 가해지는 현재 비판의 수위에 비해 훨씬 낮은 강도의 비판을 받아야 하므로 그녀가 서이초 사태, 교권 추락의 원흉으로 꼽히는 것은 옳지 않다.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뭇매를 맞는 상황에서 그녀가 입장문을 낸 것이 안쓰럽기도, 반갑기도 했다. 오은영 박사는 "선생님들의 고충을 담는 금쪽이 방송에 대해서도 논의를 해보려고 한다"라고 밝혔다. 앞으로의 그녀의 행보가 주목된다. 남아 있는 비판들이 희석될 수 있는 행보가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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