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과학에 능통한 철학자인 제이슨 브레넌이 숱한 민주주의 옹호 주장들을 경험적으로 또 철학적으로 (상당 부분 성공적으로) 공격하는 책이다. 1인 1표와 출마할 권리 rights to vote and run for office를 부정해야 할 근거들을 수놓으며 민주주의보다 에피스토크라시(지식인 통치)가 더 정의롭고 좋은 결과를 낳는 정치체제임을 보여주려 한다. 특히 보편적 참정권인 1인 1표제가 집중포화를 받는데 이를 통해 1인 1표제를 부정하기만 해도 민주주의가 무너진다는 것과 이를 옹호하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음을 배울 수 있다.
저자는 민주주의보다 에피스토크라시가 더 나은 정치체제로 생각되지만 이것이 경험적으로 증명되면 그때 에피스토크라시를 전면 채택하자는 약한 주장을 한다. 여기서 에피스토크라시는 투표권을 지식수준이 상위 10% 정도인 사람들에게만 부여하자는 것이 아니라 무능한 것으로 판명되는 하위 몇 %만 배제하자는 온건한 형태의 에피스토크라시를 논한다.
책은 다음과 같이 구성된다. 1장은 여는 글이며, 2장은 유권자 행동에 대한 연구 문헌을 검토하여 대부분의 민주 시민과 유권자가 무지하고, 비합리적이고, 잘못된 정보를 가진 사람들임을 입증한다. 3장에서는 정치 참여가 우리를 더 나쁘게 만드는 경향이 있으며 숙의 민주주의조차 그렇다는 것을 경험적 증거를 통해 보여준다. 4장에서는 참정권이 개인에게 힘을 부여한다는 주장*을 무효화하고. 5장에서는 민주주의에 대한 기호론적 근거 semiotic grounds **들이 효과적이지 않다고 주장한다. 6장에서는 에피스토크라시의 핵심인 역량 원칙 competence principle을 옹호하고, 7장에서는 다양한 수학적 정리에 기초하여 유권자 개개인이 무지하더라도 민주적 유권자들이 집단 조직으로서는 훌륭한 결정을 내리는 경향이 있다는 주장에 반박한다. 8장에서는 에피스토크라시의 예시들을 다양하게 소개하고 이것들의 잠재적 이익과 위험성을 논의한 다음 가능한 반대들에 대응한다. 9장은 나가는 말이다.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에 싸움을 거는 것이 철학적인 태도라면 오늘날의 공리인 민주주의에게 도전장을 내미는 이 책은 아주 철학적이라 할 수 있겠다. 개요만 봐도 가늠할 수 있듯이 철학적 사고 훈련에 큰 도움이 되는 책이다.
* 개인에게 힘을 부여한다는 주장은 아래와 같다.
당신의 정치적 자유와 참여는 당신이 정부에 동의를 표현하여 정부와 합의된 관계를 맺도록 한다.
당신의 정치적 자유와 참여는 정부가 당신의 이익에 반응하게 한다.
당신의 정치적 자유와 참여는 당신에게 더 많은 자율성을 준다.
당신의 정치적 자유와 참여는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지배하는 것을 막는다.
당신의 정치적 자유와 참여는 당신이 올바른 삶의 감각과 정의감을 위한 능력을 기르는데 필수적이다.
** 브레넌이 논하는 민주주의의 기호론적 근거들은 아래와 같다.
민주주의는 모든 시민이 평등하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필요하다.
민주주의는 적절한 사회적 인정이나 주체성 agency에 대한 인정을 위해 필요하다.
민주주의는 자긍심을 위한 사회적 기반으로서 필요하다.
민주주의는 타인에게 존중받기 위한 사회적 기반으로서 필요하다.
민주주의는 사회의 완전한 구성원으로 적절히 포함되기 위해 필요하다.
비민주적인 구조는 아무리 잘 운영해도 시민의 존엄성에 대한 모욕이다.
덧붙이는 말
1. 원래 제목은 'Against Democracy'로 영어 원서로 읽는 것을 추천한다. 오역이 상당히 많은데 중요한 대목들에서 오역한 부분도 많으며, 일부 영어 문장들은 생략되어 국역본으로 읽을 시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부분들이 많다.
2. 총선 기간에 포스팅하게 되었는데 '투표할 자격이 없는 사람은 투표하지 마라~~'라는 의미를 담았다거나 투표율을 떨어뜨리려고 하는 것이 절대 아니니 오해하지 마시길 ㅠㅠ (저는 민주주의를 지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