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후 떠난 한 달간의 여행 이야기 5

스위스 리기산에서 리스본까지

by 밀쌀

취리히 공항 도착홀에서 친구를 기다렸다.

혼자 시작한 여행이었다. 짐도 가볍게, 일정도 느슨하게. 그렇게 혼자였던 여행에 갑자기 사람이 생겼다. 오랜 친구가 여행을 시작하기 직전 괜찮다면 잠깐이라도 함께 여행하고 싶다는 메시지를 보내왔었다. 고심 끝에 좋아… 함께 여행하자…라고 결정했고, 그 친구가 한국에서 날아온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었다. 도착홀 문이 열릴 때마다 눈이 갔다. 그러다 눈이 마주쳤다. 우리는 동시에 웃었고, 나는 달려가 친구를 와락 끌어안았다.

다음 날, 우리는 리기산으로 향했다.

리기산 (Rigi) 은 스위스 중부, 루체른 호수 옆에 자리한 산이다. 해발 1,800미터가 넘는 정상까지 산악열차가 올라간다. '산들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가진 곳. 리기산은 이번이 다섯 번째다. 스위스에 출장을 오거나 여행을 할 기회가 생기면 오르는 산이다. 친구에게 보여주고 함께 걸어보고 싶은 곳이다.

취리히 공항역에서 기차를 타고 아트골다우에 도착하여 산악열차로 갈아탔다. 올라갈수록 구름인지 안개인지 눈앞이 가려졌다. 아래로는 루체른 호수가 점점 작아졌고, 위로는 안개가 점점 가까워졌다. 정상에 도착하니 사방이 안개 속이었다. 탁 트인 전망을 기대했다면 실망스러울 수도 있는 날씨였다.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구름이 산등성이를 스치듯 흘러가고, 그 틈으로 잠깐씩 아래 세상이 보였다가 다시 가려졌다. 보일 듯 말 듯 한 풍경이 눈길을 한동안 붙잡았다.

기차에서 내린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서 있었다. 병풍처럼 둘러싸인 풍경에 압도당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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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기산을 내려온 다음 날, 우리는 포르투갈로 날아갔다.

포르투 (Porto).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도시가 있다. 나에게는 포르투가 그런 곳이었다. 오래전 회사에서 만난 친구 고향이 포르투다. 아직까지 가본 적은 없는데 마치 가본 듯한 느낌이 드는… 오래된 골목, 알록달록한 아줄레주 타일, 도루강, 와인. 막연하게 그려왔던 풍경이 실제로 눈앞에 펼쳐졌다.

3박 4일 동안 우리는 서두르지 않았다. 카페에서 에스프레소를 마시고, 파스텔 드 나타 (에그 타르트)를 먹었다. 오르락내리락 골목을 걷고 나면 젤라또를 하나씩 베어 물었다. 그러다 지치면 강변에 앉아 쉬었다.

도루강변의 오래된 와이너리 창고들이 늘어선 히베이라 지구를 걸었다. 그러다가 포르투 와인 테이스팅에 50유로를 지불하고 우리는 달달한 세 종류의 포르투 와인을 홀짝홀짝 마셨다. 낮에 마시는 와인이었다. 그것도 좋았다.

나와 친구는 여행을 잘하는 사람이었다. 무리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너무 느리지도 않게. 둘이 걷는 속도가 잘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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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에서 기차로 두 시간, 리스본 (Lisboa)으로 이동했다. 산타 아폴로냐역에 내렸다. 기차에서 내린 우리는 잠깐 멍하니 서 있었다. 역광장 앞은 시원하게 펼쳐진 바다, 뒤를 돌아보니 아기자기한 언덕이 끝도 없이 이어져 있다. 리스본은 포르투보다 훨씬 크고 분주했다. 포르투갈을 연상케 하는 노란색 트램이 좁은 언덕길을 오르내리고 있고, 골목 어딘가에서는 파두 음악이 흘러나왔다.

리스본을 어떻게, 무엇을 볼까.. 고민하던 우리는 시내 구석구석을 연결해 주면서 다니는 관광버스를 탔다. 쏟아지는 햇빛이 두렵기도 했지만 파란 하늘이 우리를 압도했다. 버스의 2층에 자리 잡고 앉아, 라디어 리시버를 통해 해설을 들으면서 시내 관광을 즐겼다. 축구구장을 한 바퀴 돌아 나왔고, 바닷가 해변길을 달렸다. 그리고 시내를 가로질러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왔다. 허기가 함께 피곤함도 밀려들었다. 호텔로 돌아가는 길, 작은 골목길에 자리 잡은 소박한 음식점에서 집밥 같은 저녁식사를 했다.

이런 게 내가 생각하는 여행이야… 친구가 나도 너무 좋아..라고 화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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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에서의 마지막 날, 우리는 당일치기 투어 프로그램을 이용해 신트라와 호카곶을 다녀왔다.

신트라 (Sintra)는 리스본에서 서쪽으로 30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울창한 숲 사이로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궁전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페나 궁전의 노랗고 빨간 외벽이 나무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을 때, 친구와 나는 동시에 탄성을 질렀다. 말 그래도 동화다. 어른인 내게서 이런 반응이 나온다는 게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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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카곶 (Cabo da Roca)은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땅끝 마을이다. 여기서부터는 큰 바다, 대서양뿐이다. 절벽 끝에 서서 바람을 맞았다. 절벽 따라 이어진 좁다란 길을 따라 걸었다. 그리고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았다. 머릿속이 텅 비는 느낌의 시원함이었다. 퇴임 후에 처음 느껴본 그런 시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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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어 버스가 리스본 시내로 돌아올 무렵 해가 기울고 있었다. 우리는 호텔과 가까운 이탈리안 식당을 찾아 들어갔다. 파스타와 문어요리를 주문했다. 포르투갈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아쉬워하며 그냥 먹고, 마시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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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이면 뮌헨으로 떠난다는 걸 알면서도, 아쉽다는 말은 굳이 꺼내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 알고 있었으니까. 아쉽지만 충만했다. 이 3박 4일이 꽉 찼다는 느낌… 내일 뮌헨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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