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후 떠난 한 달간의 여행 이야기 4

슬리퍼는 벗어두고 — 호수를 따라 브레겐츠로

by 밀쌀

아침에 눈을 떴다. 또 빗소리였다.

콘스탄츠에 머무는 동안 비가 꽤 자주 내렸다. 처음엔 조금 아쉬웠지만, 가을로 접어드는구나.. 싶어 받아들이게 되었다.

콘스탄츠 호수 - 독일어로 보덴지 (Bodensee)라고 부르는 이 호수는 독일, 스위스, 오스트리아 세 나라가 맞닿아 있는 곳이다. 안개가 낀 날은 호수 건너편이 어느 나라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오늘은 호수를 따라가 보기로 했다. 목적지는 오스트리아의 브레겐츠 (Bregenz).

콘스탄츠역에서 기차를 탔다. 브레겐츠까지는 한 시간 남짓. 기차는 보덴지 호숫가를 따라 달렸다. 창밖으로 호수가 줄곧 따라왔다. 물빛은 날씨 탓인지 짙은 회청색이었고, 멀리 보이는 알프스는 구름에 반쯤 가려져 있었다. 기차 안은 조용했다. 관광객이 많은 느낌은 아니었다. 아마도 호수를 건너는 페리를 더 많이 이용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창밖을 보고 있으면 딱히 생각을 하지 않게 된다. 그냥 보게 된다. 그냥 있게 된다. 퇴직 후 처음으로 배운 것이 바로 이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잠깐 스쳤다.


IMG_5566.jpeg
IMG_5571.jpeg


브레겐츠역에 내리자 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호수를 등지고 뒤로는 산이 가파르게 올라와 있고, 그 사이에 아담한 구시가지가 자리 잡고 있었다. 크지 않은 도시였다. 오히려 그래서 마음에 들었다.

구시가지로 올라가는 길을 걸었다. 골목이 좁고 돌바닥이 울퉁불퉁했다. 성벽과 탑이 남아있는 오래된 마을이었다. 관광지라기보다는 사람들이 실제로 살고 있는 동네 같은 느낌이었다. 파머스 마켓이 열리는 날이었나 보다. 과일 채소가 수북하게 쌓인 매대가 보였다. 작은 골목에서는 빵 굽는 냄새가 났다. 나의 베이스캠프가 있는 콘스탄츠의 동네 빵집이 떠올랐다.


IMG_5589.jpeg
IMG_5582.jpeg
IMG_5603.jpeg
IMG_5593.jpeg


전망대에 오르기 위해 케이블카를 탔다. 구름사이로 보덴지가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케이블카에서 내리니 오스트리아 알프스의 웅장한 모습이 눈앞에 펼쳐졌다. 드디어 이번 여행의 가장 큰 목적인 알프스가 바로 여기 있었다. 어서 걸어야지… 가슴이 두근두근 설레기 시작했다.

잠깐이지만 우산이 소용없을 정도로 비바람이 불다 그쳤다. 호수가 내려다 보이는 알프스를 걸었다. 이렇게 나의 여행이 시작되는구나… 발걸음이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IMG_5634.jpeg
IMG_5620.jpeg
IMG_5621.jpeg


브레겐츠는 여름이면 호수 위 무대에서 열리는 야외 오페라로 유명하다고 한다. 브레겐츠 페스티벌. 세계에서 가장 큰 수상 무대라고 하는데, 시즌이 지난 터라 무대는 철거 중이었다. 남아있는 구조물과 호수가 어우러진 풍경을 바라보며, 언젠가 오페라 시즌에 다시 한번 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점심은 구시가지 골목 안쪽의 작은 카페에서 먹었다. 내가 좋아하는 프로슈토, 올리브, 호밀빵… 그리고 카푸치노 한 잔. 화려하지 않았지만, 맛이 꽤 좋았다.


IMG_5648.jpeg
18FCBF6B-1C06-4CDA-B030-C4A52FF6694F.JPG


카페를 나와 호수변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바람이 잔잔했다. 벤치에 앉아 가방에서 스케치북을 꺼냈다. 호수와 산, 그리고 브레겐츠 시가지. 무엇을 그려볼까… 전망대 가는 길에 지나갔던 독특한 형식의 성당이 떠올랐다. 그 성당이 아주 좋은 구도로 사진첩에 보관되어 있었다. 잘 그리려고 하지 않았다. 그냥 지금 이 순간을 손으로 기록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IMG_5658.jpeg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창밖을 다시 바라봤다. 아까 올 때와 같은 호수였지만, 오후의 빛이 달랐다. 구름이 조금 걷힌 틈 사이로 수면이 반짝였다.

오늘 하루 특별한 것은 없었다. 기차를 탔고, 오래된 골목을 돌아봤고, 알프스를 걸었다. 그리고 카푸치노를 마셨고, 그림을 그렸다. 그것으로 충분한 하루였다.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 브레겐츠 다녀왔다고. 답장이 왔다. 거기 갔어? 좋았어? 좋았어. 아주.

작가의 이전글퇴직 후 떠난 한 달간의 여행 이야기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