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후 떠난 한 달간의 여행 이야기 3

비 오는 아침, 국경을 넘다

by 밀쌀

독일에서의 첫날밤은 시차가 뭐지.. 싶을 정도로 꿀잠이었다. 낯선 침대인데도 편안했나 보다. 지붕 위 후드득거리는 빗소리에 잠을 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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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_5470.jpeg 비 내린 콘스탄츠 거리 (독일)


느긋한 아침이다. 슬리퍼 차림에 우산을 쓰고 빵집으로 갔다. 한 블록도 채 안 되는 거리에 이런 맛집이 있다는 건 행운이다. 몇 번밖에 방문하지 않았는데도, 주인은 나를 알아본다. 흔하지 않은 아시안 손님이기도 하고, 서투른 독일어와 영어를 섞어가며 주문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을 것이다. 프레첼, 크루아상, 시나몬 롤을 사 왔다. 그 사이에 친구는 우유를 끓여 거기에 콜롬비아산 커피가루를 넣어 라떼를 만들고 있었다. 고소한 우유 냄새와 커피 향이 집안에 퍼졌다.

아침식사를 하면서 많은 얘기들을 나눴다. 회사이야기, 예전 동료이야기, 가족이야기.. 별다를 것 없는 일상이지만 이 친구와 함께 있으면 얘깃거리가 샘솟듯이 생겨났다.

느긋하고 푸근한 마음으로 아침식사를 마친 우리는 각자의 하루 일정을 시작했다. 친구는 회사로 출근하고, 나는 콘스탄츠 호숫가 스위스의 작은 마을, 살렌슈타인 (Salenstein) 아레넨베르크 성 (Schloss Arenenberg)을 미리 점찍어 두었다. 성이라는 화려함보다는 망명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걸려서였다.


이곳은 나폴레옹 1세의 처제이자 수양딸인 오르탕스 드 보아르네가 1817년 매입했고, 황제에서 물러난 후 망명 생활을 했다. 또한 나폴레옹 3세가 어린 시절을 보내며 황제의 꿈을 키운 곳으로, 이곳에서 프랑스 황제 스타일의 화려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현재는 19세기 당시의 가구, 장식물, 개인 소장품들이 그대로 보존된 "나폴레옹 박물관"으로 운영 중이며, 스위스 중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IMG_5495.jpeg 아레넨베르크성 나폴레옹 박물관 (스위스)


독일에 있는 친구집을 떠나 5분 정도 걸으면 독일-스위스 국경이다. 국경수비대나 세관원이 눈에 띄지 않아도 국경을 넘을 때는 늘 긴장된다. 발걸음이 나도 모르게 빨라지고, 도로 표지판 하나만 달라져도 괜히 자세가 바르게 펴진다.

국경을 넘어 한적한 시골길을 걷다 보면, 스위스의 크로이츠링엔 (Kreuzlingen) 역 플랫폼이 눈앞에 떡하니 나타난다. 이 역에서 기차를 타고 (약 10분) 마넨바흐-살렌베르크 (Mannenbach-Salenberg) 역에서 내렸다. 아레넨베르크성으로 가는 길을 안내하는 표지판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IMG_5474.jpeg 독일 콘스탄츠-스위스 국경
IMG_5493.jpeg 콘스탄츠 호숫가의 마넨바흐-살렌베르크역 (스위스)


성으로 올라가는 길은 비 온 뒤의 말끔함과 한적한 교외의 풍경이었다. 편안한 산책길이 될 거라 기대했지만 꽤나 가파른 오르막이었다. 간헐적으로 흩뿌리던 비가 우산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빗물이 얼굴을 적시기도 했다.

나폴레옹 박물관은 황제의 삶이 얼마나 화려했을지를 가늠하게 할 수준이었다. 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성 안을 천천히 걸었다. 평일이기도 했고, 관광객이 찾을 만한 곳은 아니어서인지 사람이 거의 없고, 관리인들 몇몇만이 눈에 띄었다.

밥 먹을 곳을 찾아보았으나, 성 안에 레스토랑은 영업을 하지 않는 듯했다. 배가 고팠다. 왔던 길을 꽤 빠른 걸음으로 내려왔다. 다행히 기차역 옆에 작고 소박한 피자집이 있었다. 점심으로 루꼴라가 듬뿍 올려진 피자와 탄산수를 시켰다. 루꼴라 피자는 언제나 나의 기대를 만족시킨다.


IMG_5511.jpeg 기차역 피자집
IMG_5513.jpeg 루꼴라 피자와 탄산수


나의 첫 여행지 – 화려해서가 아니라, 사람이 없어서 더 좋았다. 나의 느린 속도가 허락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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