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첼과 크루아상, 그리고 라떼 한 잔
무더위가 절정이던 8월 중순, 여름밤 도착한 인천공항 1 터미널은 예상보다 한가했다. 휴가의 피크는 이미 지났고, 밤에 떠나는 비행기도 많지 않았던 모양이다.
핀란드 헬싱키를 거쳐 가는 일정을 고른 건 직항보다 가격이 저렴해서이기도 했지만, 사실은 조금 엉뚱한 기대 때문이었다. 북유럽을 거쳐 가면 이 더위가 잠깐이라도 식지 않을까… 공항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열기를 떠올리며, 나는 그 기대를 꽤 진지하게 믿고 싶었다.
12시간의 비행은 이상하리만치 지루하지 않았다. 이미 나만의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다. 퇴직 후 취미로 시작한 그림을, 이번엔 여행의 기록으로 남겨 보기로 했다. 사진처럼 빠르게 쌓이는 기록이 아니라, 손이 따라가는 속도로 천천히 남기는 기록. 그렇게 기내에서 먹은 식사가 나의 첫 번째 여행 기록이 되었다.
이번 여행의 베이스캠프는 독일 남서부, 콘스탄츠 호숫가에 있는 콘스탄츠라는 작은 동네다. 내가 머물 집은 친구가 사는 곳이고, 스위스 취리히 공항에서 기차로 한 시간 거리다.
헬싱키를 경유해 다음 날 아침 취리히 공항에 도착했을 때, 친구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기차역에서 나를 만나 열쇠를 건네주고 본인은 출근할 테니, 공항 근처 어딜 들르지 말고 독일로 바로 오라고…
부탁인지 명령인지 애매했지만, 그 친구다운 다정함이 묻어 있었다.
그렇게 나는 콘스탄츠행 기차에 올랐다.
익숙한 풍경의 플랫폼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친구를 보자마자, 나는 양팔을 한껏 벌려 힘껏 안아 주었다. 오랜 시간의 공백이 그 포옹 하나로 단숨에 접히는 느낌이었다.
베이스캠프의 주인인 이 친구와 나는 회사 동료로 만나 절친이 되었다. 정확히 몇 살 차이인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스무 살쯤 차이 나는 것 같기도 하다. 고향은 남미 온두라스. 한국 음식과 문화를 사랑하고, 함께 있으면 분위기가 금세 밝아지는 사람이다.
독일에서 처음 만났을 때 우리는 영어와 한국어, 그리고 약간의 스페인어를 적당히 섞어가며 대화를 이어갔다. 친구가 한국 드라마를 나보다 더 많이 알고 더 좋아한 덕분에, 말이 막히는 순간에도 웃음이 먼저 나왔다.
집 열쇠를 내 손에 쥐여주고 친구는 출근을 했다. 그리고 나는 한 달 동안 언제든 돌아와 쉴 수 있는 보금자리에 짐을 풀었다. 낯선 나라에서 생긴 ‘돌아올 곳’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여행을 시작해 볼까?
내가 생각하는 이번 여행의 시작은 근사한 관광지 방문이 아니다. 집 근처 빵집에 슬리퍼 차림으로 나가, 좋아하는 빵을 서너 개 사 오는 것.
버터를 듬뿍 바른 빵을 친구와 나눠 먹고, 뜨겁게 데운 우유에 진한 커피를 섞어 라떼를 만들어 함께 마시는 것. 그런 사소한 아침이, 이번 여행의 첫 장면이 되었으면 했다.
짧은 낮잠을 자고 일어났다. 내가 좋아하는 프레첼과 크루아상, 그리고 친구가 좋아하는 달콤한 빵을 사기 위해 집을 나섰다. 울퉁불퉁 돌바닥에 긁히는 슬리퍼 소리가 내가 얻은 새로운 시간의 소리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