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결심하며
“은퇴하면 적어도 한 달 동안은 매일 산길을 걸으며 나무와 꽃을 보고 냄새를 맡으며 지낼 거야.” 하루하루가 숨 가쁘고 버겁게 느껴지던 어느 날, 나 자신에게 했던 약속이었다.
생각보다 그 시간이 갑자기, 빠르게 찾아왔다.
비자발적 퇴임을 통보받았다. 연말 정기인사가 2주 정도 남았던 어느 금요일 오전 대표이사 비서로부터 7층 대표이사 집무실로 올라오라는 전화가 왔다.
가슴이 철렁하는 느낌이 왔다.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는 말이 생각났다.
대표이사와의 면담-퇴임 통보와 수용-은 5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냥 다 잊고 신나게 놀고 편히 쉬기로 마음먹었다.
늦잠자기, 친구들과의 수다, 집밥 먹기, 취미 찾기 등 많은 것들을 행동에 옮겼다.
동시에 들끓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가슴앓이하는 시간들도 있었다.
알람이 없어도 새벽이면 눈이 떠졌다. “오늘은 무슨 요일이지?” “회사를 가는 날인가?” 아주 짧은 혼돈의 순간을 자주 접했다.
이메일, 문자메시지가 거의 들어오지 않는다. 허전하고 서운한 마음이 앞섰다.
그러면서도 하루하루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고, 서서히 적응되어 갔다.
하루가 48시간이었으면 좋겠다고 외쳤던 내게, 이제 남아도는 건 시간이었다.
오랫동안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퇴직 후의 여행을 실행에 옮기기로 결심했다.
한 달이라는 기간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언제 어디로 떠날 것인가, 누구와 함께 갈까, 아니면 혼자 갈까.. 많은 선택이 필요했다.
6년 전, 회사일로 2년 정도 살았던 독일의 한 작은 도시가 떠올랐다. 친한 친구가 살고 있었고, 오랜만에 한 번쯤 다시 만나고 싶은 지인들도 있고, 무엇보다 알프스가 가까운 동네였다. 여행계획의 절반 이상이 세워졌다.
언제 누구와 갈까.. 가 관건이었다. 가장 편안한 여행파트너는 남편이다.
여행의 피크시즌 후인 8월 말에 한 달간의 유럽여행 – 한 달간의 알프스 하이킹을 제안했다.
남편은 이번 여행을 함께 하고 싶지만, 그만큼의 시간을 빼기가 어렵다고 했다.
대신, 지난 30여 년간 열심히 일했으니 혼자서라도 여행을 다녀와라.. 산길을 걷고 싶은 만큼 걷고, 친구 만나서 맛있는 거 많이 먹고, 사고 싶은 거 사고…
남편의 진심 어린 동의가 고마웠고, 또 미안했다.
주말부부인 우리는 전화로 메시지로 하루를 시작하고 마무리한다. 사소한 일을 공유하고 웃고 떠든다. 주말이 되면 밥을 함께 먹고 산책을 하고, TV를 보고 가끔은 영화관엘 간다.
내가 떠나 있을 한 달간의 빈자리로 인한 그는 허전함을 상상할 수 있어 나의 고마운 마음은 깊어졌다.
비행기표를 구매했고, 사전예약이 필요한 숙소를 정했다.
이렇게 여행의 구체적인 계획이 세워지기 시작했고, 세부 일정을 하나하나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8월 중순 어느 날 밤 비행기를 탔다. 첫 번째 목적지인 서남부 독일로 들어가기 위해 핀란드의 헬싱키를 거처 스위스 취리히로 출발했다.
마음이 몽글몽글했다.
아름다운 나무와 꽃, 숲들이 떠올랐고, 맛있는 독일빵과 카푸치노를 상상하며 좌석에 비스듬히 기대어, 나 자신에게 주는 선물인 유럽 여행을 설레는 마음으로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