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스쳐간 낯설고 농염한 꿈
비밀; 사랑할 때 우리가 감추고 있는 속마음
어젯밤에 스쳐간
낯설고 농염한 꿈
언젠가 한번, 기대 없이 보러 간 영화에서 진한 감동을 받고 나오는 길, 배우가 되고 싶었다. 연기는 세상을 착시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는다. 이를테면 영화 <어바웃 타임>의 주인공 팀 역을 연기하는 동안, 배우는 실제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된다. 과거를 맞닥뜨리는 때 느껴지는 감정이 환희인지 후회인지는 죄책감인지는 시간의 문턱을 직접 넘어봐야 알 수 있겠으나, 연기는 자신의 능력을 실제라고 믿고 하는 행위 일테니, 팀 역을 연기한 배우 도널 글리슨은 그러한 능력을 잠시 부여받았다 해도 무방할 것이다. 손가락을 벽에 천천히 가져다 대면 언젠가 한 번은 너머로 사라지지 않을까, 그런 환상을 한쪽 모퉁이에 품고 사는 나로서는 꽤나 탐나는 예술이 연기다.
만약(정말로 만약이다), 내가 연기를 하게 된다면 상황은 이렇다. 나는 혜화역 2번 출구 앞에서 친구를 기다리고 있다. 검은색 비니 모자를 쓴 남자가 나를 보고 자꾸만 눈을 흘깃거린다. 그의 곁눈질을 나도 모르진 않는다. 잠시 후 그가 넓은 보폭으로 성큼성큼 다가온다.
남자는 자신을 매니지먼트 기획이사라고 소개한다. 회사는 청담동에 위치해 있고, 듣고 모르지 않을 배우들의 이름을 줄줄이 나열한 뒤, 대뜸 내가 마음에 든다고 하는 거다. 나는 갑작스러운 고백에 대체 어디가 마음에 드냐고 반문하게 될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올해 회사에서 투자한 영화가 장르별로 한 편씩 있는데, 키 큰 배우를 찾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요즘 배우 지망생 중에는, 키 큰 애들이 죄다 얼굴이 작아서, 화면에 담았을 때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거다. 그 말인즉, 키 크고 얼굴도 커서 현실감 있게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는 캐릭터를 찾고 있었고, 우연찮게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는 거다.
큰 얼굴에 콤플렉스를 느끼던 나는 내심 들떠서 어떤 영화에서 나를 원하는지 묻게 되겠지. 그가 선택권을 주겠다고 한다. 보기는 세 가지. 격정적 로맨스영화의 젊은 남자역할(이건 조연이라도 좋겠다.), 비극적 운명으로 아픈 사랑을 해야만 하는 남자 주인공(이건 예술 영화다), 마지막으로 총격전이 난무하는 남성미 물씬한 영화, 예를 들면 <제이슨 본>의 맷 데이먼 같은 역할, 그 중에 원하는 역할 하나를 시켜주겠다고 하는 거다. 그 앞에서 나는 한참을 망설이게 되겠지. 셋 다 한번쯤(사실 여러번) 상상해봤던 나의 욕망이니까. 꿀꺽.
아쉽게도 현실에서 나는 배우가 아니다. 당신도 아니다. 그렇다 해서 마음속에 감춘 것들이 적은 것은 아니다. 안쪽에서 일렁이는 욕망, 현실성은 떨어지고, 사회적으로 따가운 눈초리를 받아야만 하지만, 결국 누구나 한 번쯤 품어봤음직한 은밀한 바람을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까에 대해 인간은 끊임없이 사유해왔다. 그리고 그 진화의 결과물이 꿈이라고 생각한다.
꿈속에서 나는 날수도 있고, 누군가를 쏠 수도 있다. 연인이 아닌 다른 사람과 잠시 사랑에 빠지기도 하지만, 그 일로 벌을 받지 않는다. 꿈은 법의 테두리 밖에 있는 가장 합법적인 도피처다. 지켜할 것들과 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 범람하는 현실은 비릿하다. 어젯밤 스쳐간 낯설고 농염한 꿈, 나는 그 꿈들이 있기에 현실의 많은 답답한 면을 견딜 수 있다.
파도를 멈추게 할 힘이 있던가. 그럴 수 없어 파도이지 않겠는가. 베개 위로 덮쳐오는 농염한 꿈의 습격도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다. 욕망의 파도가 인다고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꿈인데, 꿈이라는데 미친듯 홀린듯 녹아 들어야 하질 않겠는가.
오늘밤에도 비밀을 가장 많이 숨겨둔 곳으로 간다. 그곳에서 나는 적극적으로 현실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