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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철우 Jan 14. 2021

<글쟁이의 새해소망>

사는 게 열등하냐고, 삶이 내게 물었다

<글쟁이의 새해소망>

12월 31일, 매년 마지막 날 뉴스는 온통 새해소망을 말하는 시민 인터뷰로 가득 채워지지만, 나는 한 번도 새해소망이라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 없다. 아이들에게 수학을 가르치는 사람이기에, 대한민국에서 수학을 좋아하는 사람의 수가 많지 않다는 것은 익히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모든 능력이 수치화된 세상 속에 살고 있다. 학창시절엔 성적표 등수가 중요하고, 어른이 되어서는 통장잔고가 그 사람의 능력과 인품으로 평가받는다. 나는 그런 것들에 쿨해, 라고 말하는 혹자가 있을지 모르겠으나,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조차 나이라는 숫자로부터 마냥 자유롭진 못할 것이다.


 시간은 반복된다. 작년 12월 31일도, 올해 1월1일도, 별다를 것 없는 어제와 오늘 일뿐이다. 하지만 그 속에서 한 살 많아진 나이는, 가방에 책 한권 더 집어넣은 것처럼 살며시 어깨를 짓누른다. 책임감이다. 어쩌면 나는 책임지기 싫어서 피하는 거다. 이십대 초반은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스스로 위안 삼을 수 있었다면, 이제는 뭔가 보여줄 때가 왔는데, 상황은 달라진 게 없고, 반면에 엄마아빠 주름살이 깊어지는 건 두 눈에 선명하다. 그래서 새해에 소망이랍시고 호들갑 떨지 않았으면 좋겠는지 모른다. 새해가 누군가에겐 기대의 대상일 수 있지만, 새해라는 단어만으로 청춘에겐 불안감을 야기하기도 하니까.

 새해가 밝고 하루가 지나서 이른 아침 친구 전화를 받았다. 얼마 전 시험에 합격해 기자가 된 친구였다. 십분 전화 인터뷰에 응해줄 수 있냐는 부탁을 받았다. 돈 빌려달라는 사채업자 같은 컨셉만 아니면 웬만해선 부탁을 거절하는 일이 없기에 자초지종 무슨 내용에 관한 인터뷰인지도 모르고 흔쾌히 “그럼~”이라고 사람좋은 투로 대답했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로 “딴 건 아니고 새해소망에 관한 건데.”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아, 나 그런 거 없는데, 라는 말이 단전에서 출발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기자시험에 합격하고 처음 인터뷰를 요청하는 친구한테 차마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해 도로 집어넣었다. 이어진 십분 동안 한 평생 생각해본 적 없는 작년 한해에 대한 총평과 새해소망에 대해 주저리 주저리 늘어놓았다. 끝에 친구는 고맙다고 말하면서 전화를 끊었지만, 내가 생각해도 한심한 답변만 한 게 마음에 걸렸다. 좀 건져 먹을 거 있는 말이라도 했어야 했는데, 자책했지만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질문 앞에서 누구나 당황할 수밖에 없지 뭐, 스스로 위로하고 읽던 책이나 마저 읽었다.  

 나는 왜 글을 쓸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앞으로도 글을 계속 쓸 수 있을까,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다. 며칠 전, 문학잡지를 읽고 있었다. 평소 즐겨 읽는 작가님의 인터뷰가 실려 있었고, 여지없이 새해소망을 묻는 기자님의 질문도 들어 있었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글을 써요. 그래서 새해소망도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거예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나는 같은 이유로 글을 쓰진 않는다.


내게 글은, 세상에 숨겨진 아름다움을 더 많이 발견하고, 세상에 소개하는 작업이다. 나는 천성이 배려심 많고 착한 성격이 아니라서, 글을 쓰지 않으면 꽃의 아름다움을 비웃고, 내면의 아름다움을 부질없음으로 치부하며 살게 될 것이다. 선과 악이 공존하는 하나의 인격체로서, 세상에 해가 되지 않기 위해 일상 곳곳에 숨겨진 아름다움을 찾아다니며 글로 표현한다. 결국 이것도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글을 쓰는 것과 같은 이유네, 쓰고 보니 그렇다. 한 줄로 써도 될 말을 이렇게 주저리 주저리 늘어놓는 걸 보니 올해는 좀 더 부지런히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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