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의를 베풀면 건성으로 돌려주는 나의 연인

비밀; 사랑할 때 우리가 감추고 있는 속마음

by 박철우

성의를 건성으로 받는,
무심한 당신


첫눈에 반했다는 말을 신뢰하지 않는다. 어딘가 좀 의심스럽다. 내게 한 사람을 알아가는 과정은, 능선을 넘는 것만 같아서 시작은 가파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조금 더 알고 싶은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을 은밀한 시험에 빠뜨리는 수작을 부리곤 한다.


장소는 도서관, 설정은 이렇다. 조금 일찍 도착해, 내가 먼저 너른 책상에 자리잡고 앉아 글을 쓴다. 상대는 약속시간에 맞춰 도서관에 도착하겠지만, 메시지를 확인하지 않는 나를 찾아 이리저리 헤매게 될 것이다.


책장 사이를 비집고 다니다보면, 한쪽 모퉁이에 앉아 모니터에 집중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지금부터가 본격적인 시험의 시작. 상대는 당연히 내가 앉은 쪽으로 걸어올 것이다. 이 때 그는 두 가지 선택을 할 수 있는데, 하나는 집중하고 있는 나의 어깨를 툭툭 쳐서 자신이 왔음을 알리는 것과 다른 하나는 비어있는 옆자리의 의자를 밀고, 소란스럽지 않게 앉는 것이다. 나의 오랜 친구들은 모두 후자에 속했다.


도서관은 암묵적으로 침묵상태를 유지하기로 합의된 장소이며, 각자에 집중하는 사람들의 주변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 기류 속에서 자신의 반가움만 우선시하는 사람과의 만남은 어딘가 좀 허전하다. 유독 매운맛만 강한 짬뽕을 먹은 기분이 들곤 하는데, 다음 날 꼭 탈이 난다.


또 가방을 내려놓을 때는 어떤가. 쿵. 주변사람의 집중은 안중에도 없다. 겨울이면 자켓의 지퍼를 후두둑 내리고, 필통을 요란스럽게 열고는 연필도 또르륵 굴린다. 나는 이런 사람을 만나게 되는 때면,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눈을 감는다. 그의 모든 만행이 끝나고 얼른 자기의 것에 집중하기만을 기다린다.


마지막으로 끽 소리가 들린 뒤, 한동안 옆이 조용하다. 눈을 뜬다. 그는 퇴장하고 없다. 삐죽 튀어나온 의자는, 커피 마시러 나간 임대인이 돌아오는 때까지 불친절한 모서리가 된다. 암전.

배려가 없는 사랑 안에서, 모든 성의는 건성이 된다. 관계의 질량보존의 법칙을 따르는 그는, 자기가 무심한 만큼 상대가 저를 좋아해 주리라 믿는다. 아니라면 힘껏 달려온 메시지에 괜히 늦게 답하는 수작을 부릴 리 없다.


또한 중력에도 관심이 많아서, 뛰어봤자 결국엔 자기 곁으로 돌아오리라는 아주 큰 착각을 한다. 아니고서 오만한 그의 표정을 설명할 길이 없다. 전부 드라마에 심취한 탓이겠다.


사랑이 노크하는 일이라면, 애정은 대문을 열어주는 일, 당신이 내가 사는 가장 은밀한 곳으로 침입해도 좋다는 허락이다. 사랑이 양동이 같은 투박한 바스켓이라면, 애정은 두 칸으로 나누어진 섬세한 연필꽂이. 사랑에는 물을 부어 전체 마음이 차올라도, 애정은 한쪽에만 고여 버리고 마는 것. 수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고인물에서 이내 악취가 나는 것. 온도가 떨어지면 굳는 것은 꿀만이 아니다. 마음도 그렇다.


사랑 안에는 사랑과 사랑이 있다. 그 둘은 서로 조금 다르다. 나에겐 좋은 날이었는데, 나에게만 좋은 날이었던 건 아니었던지. 따뜻했던 날도, 어쩌면 나 혼자 따뜻했던 건 아니었던지. 무심함은 자꾸만 나쁜 쪽으로 나를 이끈다.


무심한 사랑을 지속하는 것은, 눈보라 치는 날,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낯선 동네를 걷는 것과도 같다. 추우니까 온기가 필요한 거다. 따뜻해 보이는 집 안을 기웃거리며 누가 불러주길 바라는, 그러다 기차를 타고 자꾸만 어딘가로 떠나고 싶어지는 거다. 가능하면 따뜻한 곳으로. 허술한 저녁만 되면 부질없는 모닥불을 피우고 외는 기도처럼. 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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