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닌 줄 알면서도 진심을 비꼬려는 마음

비밀; 사랑할 때 우리가 감추고 있는 속마음

by 박철우

진심을 왜곡하려는
마음

날씨가 명백히 투영되는 창가에 앉아, 어젯밤 읽다 만 시집을 꺼내 들었다. 비바람이 세찼다. 유리 한 장을 맞대고 앉은 길가의 느티나무 한 그루가 사정없이 진동했고, 그 파동으로 유리의 안면에 물기를 퍼부었다. 얼마나 갑작스러웠던지 그만 내가 움찔하고 말았다. 비가 많이 오는구나... 아래를 내려다보았지만 도로는 막힘없었고, 우산을 쓰고 걷는 이도 없었다.


나의 착시였다. 유리를 세차게 때린 빗물의 정체는, 새벽 동안 나뭇잎에 내려앉은 이슬이었다. 유리는 차단을 원했지만, 완전한 차단을 원하지 않았다. 빗물을 투영했지만, 날씨를 투영하진 않았다.


세상은 종종 착시해서 아름답고, 착시해서 왜곡되기도 한다. 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이 유리벽이 존재하는 것만 같다. 햇빛은 통과해도 바람은 여과되는 벽이라서, 마음으로 내리쬐는 호의만이 그 사람의 진심인양 착각하기도 한다.
사람과 사람은 그래서 더 어려운 거다. 당신의 따스한 볕에 세찬 바람을 함께 실어 보내지는 않았는지, 내가 당신을 착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꾸만 의심이 되는 거다. 다가가기 망설여서 떠나보낸 인연이 짧은 생에 얼마나 많았던가.


한 사람을 온전히 느끼고 싶다면, 유리벽을 치우고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용기가 필요하다. 창가에 화분을 올려놓고 키워본 사람은 안다. 충분한 볕을 쬐고도 꽃이 시들 수 있다는 사실을. 바람이 없어 그렇다. 창문을 열어주면, 세찬 바람에 꽃잎이 떨어져 나갈까 걱정했기 때문에 언제나 문은 꽁꽁 닫혀 있었고, 꽃은 혼자 시들었던 것이다.
사람이 일으키는 바람이 무서워, 유리벽 뒤에 숨어만 지낸다면 꽃이 시들 듯 우리도 서서히 시들어 갈 것이다. 그렇게 착시는 왜곡이 된다.

인간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가장 뜨거운 온기를 선물하는 사람, 그럼에도 잦은 바람에 자주 휘청이게 하는 사람, 연인이다.


나의 내면에는, 반항기를 가득 품은 중학생 소년이 숨어있다. 그 소년은 상처에 많이 무뎌서, 길가에서 세찬 바람을 맞고 돌아오는 날, 가장 따스한 사람에게 한기를 옮기려는 수작을 부린다. 아닌 줄 아면서, 당신의 말을 비틀어 진심을 왜곡 시킨다. 그런 날이 잦아질수록, 상대는 결국 치웠던 유리벽으로 다시 둘 사이를 가르는 시도를 하게 된다. 그러다 왜곡과 진심을 구분하지 못하는 때가 오면 사람은 떠나는 거다.

왜곡이 잦은 사람은 소중한 것과 중요한 것을 자주 헛갈려 한다. 당신과 마시는 따뜻한 차 한 잔과 그 속에 녹아있는 대화는 소중한 것이고, 차 값을 지불하기 위해 하는 노동은 중요한 일이다.


결국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중요한 일을 하게 되는 것이 사랑이겠으나, 우리는 종종 반대로 행하는 버릇이 있다. 돈 버는 일에 목숨을 걸고, 당신과 시간을 보내는 때, 피곤하다는 말로 휴식을 요구하기도 한다.


좋은 관계를 오래 유지하기 위해서 평소에 ‘잔상’을 남기는 것이 중요하다. 유리에 찍힌 지문 같이 얼룩덜룩한 잔상 말고, 따뜻한 영화를 보고 스크린을 닫는 때 마음속에서 맴도는, 오래 간직하고 싶은 잔상으로 말이다. 이러한 잔상은 일종에 보험과도 같다. 당신이 평소와 달리 까칠하게 굴어도, 당신의 연인은 노을을 착시하듯 당신의 잔상을 기억하며, 하루정도는 허상으로 당신을 착시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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