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순전히 노란 튤립 때문이었다. 이상하리만치 더웠던 4월, 숨 막히는 열기를 몰고 온 것도, 자갈 속에 피어난 잔디를 지르밟고 떠난 소녀의 뒷모습도 정자에 홀로 앉아 있는 소년을 눈물짓게 한 것도 그 모든 일은 순전히 노란 튤립 탓이었다.
소년은 두려웠을 것이다. 한시도 여유 없던 소녀의 시간이 다음날 아침, 자신에게 할애된 것을 보며. 소년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피어나는 불안감에 소녀가 자신에게 전할 말을 상상하며 얼마나 대화했을까. 아니면 피어오르는 불안감을 뒤로 한채 웃음으로 마무리하는 대화를 그렸을까? 소년이 머릿속으로 수없이 대화를 반복하는 동안, 야속한 해는 소년을 만남의 시간으로 끌고 갔다.
그들은 아무 말 없이 고개만을 끄덕였다. 마치 예정이라도 된 듯 그들은 학교 뒤편 낡은 정자로 향했다. 소년과 소녀는 분명 같은 곳을 향했지만 서로의 머릿속은 분명히 달랐으리라. 소년은 차오르는 불안감과 더 외면하려는 몸부림으로, 소녀는 실로 말할 수 없는 미안함으로 그들은 이제 탈선하려 하고 있었다.
정자에 나란히 앉았지만, 그들 사이의 간격은 전과 확연히 달랐다. 그전보다 조금은 더 넓게, 마치 다가가지 못하는 어떠한 힘이 있었던 듯이 그렇게 그들은 앉았다. 그 고요한 침묵의 무게는 그 4월의 유난히 뜨겁고도 습한 공기가 대신했다. 들이쉬는 공기에서 따가움이 내쉬는 공기에서 더한 뜨거움이 배어 있었다. 그 정적을 깬 것은 소년의 귓가에서 들려온 소녀 한숨이었다.
그 소리를 들었을 때 소년은 분명히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필시 느꼈으리라. 이어지 소녀의 말은 절정을 향해 다가가는 롤러코스터처럼 서서히, 그러나 거침없이 덜컹거리며 끝을 향해 다가갔다. 덜컹거리는 소리에 맞추어 소년의 호흡 또한 가빠졌다. 어젯밤 스멀스멀 피어올라왔던 불안이 이제는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덜컹’ 이제 완전한 끝에 다다른 것이다. 허공을 휘젓는 발아래 소년은 깨달았다. 내일이, 아니 1시간 뒤, 어쩌면 1초 뒤가 바로 추락의 순간이라는 것을.
‘미안해’ 그 말은 마치, 불행의 문을 두드리는 세 번의 짧은 노크 소리 같았다. 소년은 그녀에게 자비를 애원했다. 몇 번의 구원을 바라는 애처로운 눈빛을 소녀는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소녀가 고개를 돌리며 찰랑거리던 머릿결이 소년의 뺨 날카롭고도 무심하게 스쳤으리라.
소년의 눈이 깊은 바다에 빠져버린 듯, 애써 숨겨온 눈물이 번져왔다. 끝내 뻘겋게 부어오른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툭, 툭툭 투욱’ 그 눈물은 마치 장대비의 시작을 알리는 첫 빗방울처럼 소년의 뺨에서 손으로 떨어졌다.
소년은 이 모든 것 믿고 싶지 않았다. 불길한 예감은 왜 자꾸 틀림이 없는 것일까. 그는 눈물에 섞인 추억을 되살리며 이 비극의 원인을 찾으려 했다. 두 손을 맞잡고 걸으며 무심코 밟아버린 개미의 분노였을까? 소녀와 소년의 다정을 시기한 이들의 원한이었을까? 소년은 이유를 찾기 위해 자신의 모든 눈물을 토해내었다.
‘토닥토닥’ 나긋한 작은 손짓이 소년의 등을 두드렸다. 소년은 소녀의 이러한 다정함을 좋아했다. 불어오는 바람에 넘어져도 자신을 일으키고, 토닥여줄 ‘다정’. 그러나 지금 그 손길에서 소년은 분명한 이질감을 느꼈을 것이다. 이제는 그 다정함이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 손짓에는 그저 소년의 눈물을 그치게 하고 자신의 말에 대한 대답을 재촉하는 마음만 담겨 있을 뿐이었다. 그 이상, 그 이하의 어떤 것도 그 손짓에는 담기지 않았다.
그 순간 소년은 알았으리라, 자신이 소녀에게 선물한 노란 튤립을 말이다. 소년에게 노란 튤립은 따스한 햇살 아래, 지친 나비에게 꽃가루를 내어주며 빛나는 소녀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그래서 소년은 소녀에게 노란 튤립을 선물했다. 그 튤립이 가져올 잔인한 결말은 전혀 모른 채.
그렇다. 그 노란 튤립이 소년의 사랑을 앗아갔다. 소년은 그 꽃의 꽃말을 몰랐을 것이다. ‘헛된 사랑, 바라볼 수 없는 사랑’을 선물한 소년은 그 이름 그대로 소녀가 자신의 등을 토닥이며 서서히 바라볼 수 없는 사랑이 되어가고 있었다. 소년은 이제 받아들여야만 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저 마지막까지 부정하고 싶었다.
‘쿵’ 소년은 흘러내리던 눈물 조각들을 욱여넣고 소녀의 물음에 긍정했다. 그 순간 ‘탕’하는 총성처럼 귓속에서 이명이 울렸다. 그 소리의 주인은 소녀가 자리에서 재빨리 박차고 일어서며 낸 소리였다. 소녀는 뒤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자신의 뒤에서 울고 있는 소년이 더는 중요치 않다는 것처럼, 자갈 속에 피어난 잔디를 가뿐히 지르밟고 떠났다.
꽃이 지는 순간은 그리 길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그저 가볍게 어깨를 두드리는 작은 손짓에 고개를 떨구었다. 노란 튤립의 꽃처럼, 그 소녀는 바라볼 수도 없게 그렇게 흩어졌다. 그렇다, 이게 다 노란 튤립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