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에서 벤처처럼 일한다는 것에 대한 짧은 생각
예전에 어떤 IT계열의 대기업에서 내부적으로 일하는 방식, 기업문화를 많이 바꾸고자 했었다. 특히 이 부분은 당시 CEO의 강력한 의지가 뒷받침되어 있었다.
불필요한 회의를 줄이고,
신규 사업은 lean하게 시도하면서 pivot해 나가고,
보고문화보다는 공유문화를 지향하고,
누구나 의견을 낼 수 있는 수평문화를 추구하고,
대기업마인드를 버리고 벤처정신으로 일하고....
그러기 위해서 대기업의 속한 조직으로서는 매우 혁신적인 시도들을 했었다.
결론은 어땠을까? 안타깝게도 실패다.
지향했던 부분은 분명 의미있고 어느 누구도 반박하기 힘든 가치를 제공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실패했다. 왜그랬을까를 혼자 분석해본다.
1. 해당 사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조직장 (난 그냥 발령나서 온거고, 발령나면 갈거야~)
불필요한 회의를 줄이려면 조직의 장을 맡은 사람이 충분히 해당 업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불필요한'은 관점에 따라 달라지는 속성이다. 한번도 눈내리는 걸 겪어본 적이 없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눈은 겨울에 내리는 거야'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설명까지 들어야 할 필요가 있지만, 대한민국 살면서 '눈은 겨울에 내리는 겁니다'라는 설명부터 상사에게 해줘야 하는 실무자의 입장에서는 '이런 불필요한 회의라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니 말이다. 기본 상식부터 설명하고 이제 본론에 들어갈 참이면, 해당 조직장은 다음 회의를 위해서 자리를 떠난다. 머릿말이나 서론만 읽고 끝나는 회의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해당 사업을 바닥부터 이해하고 있지 못한 조직장들이 장악을 하고 있는 조직에서 어떻게 불필요한 회의를 줄일 수 있었겠는가? 본인이 CEO에게 보고를 하기 위해서 실무 데이터를 근간으로하여 본인 스토리로 풀어내야 하는데, 본인 스토리는 고사하고 실무 데이터를 실무자들에게 과외를 받고 들어가야하니 말이다.
벤처출신의 성공한 대부분의 IT회사들은 CEO가 해당 사업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다. 그 사업을 안고 산전수전 겪으며 그 자리에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회의할때 머릿말이나 서론부분은 건너뛸수 있고, 실무자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거나 놓친 부분은 이야기해줄 깜이 된다. 옳은 이야기든 그른 이야기든 말이다.
2. 임원이 되는게 꿈인 구성원들
벤처처럼 일하기의 일환으로 임원과 구성원들간의 벽허물기가 시도된다. 임원실도 없애고, 비서시스템도 변경하고, 그룹차원의 임원관리체계도 일정부분 거부한다. 그룹문화에만 익숙해있던 임원들이 불편함을 느꼈지만, CEO의 강한 의지가 있는 터라 별 표현은 못한다. 이 부분은 예상가능한 부분이었으나, 생각치도 못한 불만이 구성원들 사이에서 있었다고 한다.
'임원이 같은 공간에 있으니까 말하기 불편해' (커뮤니케이션하기 편하라고 했던 방침이었을 텐데...)
'나의 꿈은 임원이 되어 임원실에 들어가는건데, 그 꿈이 사라졌어'
꿈이 임원되는 것인 구성원들이 많은 환경에서는 수평문화가 오히려 모티베이션을 저해하기도 한다는 믿기힘든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물론 모든 구성원이 그랬으리라 생각되지 않는다.
3. 의견을 내기보다 지시에 따르는데 길들여진 조직환경
보통의 벤처기업들은 구성원 한명한명이 의견이 많다. 가끔은 그래서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 장기적 고민보다는 단기적 문제들을 해결해나가면서 뛰어야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의견을 주고 받는 것이 일상사다. (늘 '장기적 고민을 해야하는데 시간이 없어서 걱정이야'라고 발은 동동 구르겠지만...) 주어진 자원에 한계가 있기때문에 어쩔수 없는 선택이다.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을 때 져야하는 책임이라는 것이 회사가 망하는 것이니 얼마나 해결방안을 찾기위해 노력하겠는가!
그러나 대기업은 조직전체가 상명하복의 환경에 수년 또는 수십년간 익숙해왔고, 그 세월동안 의견을 내기보다 지시를 따르는 일을 요구받아온터라 바꾸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구성원들 모두 수평문화를 원하지만, 실은 그게 어떤 의미인지를 제대로 파악하는데는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즉, 수평문화라는 것이 내 목소리를 밑도 끝도 없이 내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주장을 논리적이고 명확하게 설득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깊이 고민해야 하고, 본인의 주장에 대한 책임감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아마도 책임감을 가지고 고민하는 부분이 제일 어렵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을 때 져야하는 책임이라는 것이 인사적 불이익이니 이 책임이 나한테는 절대 없어야 하는 것이다.
4. 벤처정신과 lean하게 시작한다는 것이 무엇지 경험해본 적이 없다
스타트업과 벤처기업에게는 벤처정신과 lean start-up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어쩔수 없는 생존 비결이다. 강한 의지를 갖고 추진했던 그 CEO도 그 실체에 대해서는 직접 경험해본적이 없기 때문에 벤처처럼 일하자고 외치지만 정작 그게 뭔지는 정확히 모른다. 또 다른 대기업 CEO에게, 나의 짧고 폭망했던 창업이야기를 해준적이 있다. 뜨거운 땡볕아래, 싸고 좋은 사무실을 찾아 삼성동부터 강남역까지 발품팔아 걸었던 이야기며, 1년간 거의 월급도 없이 일했던 이야기며, 그전에 모아놓은 돈이 있어서 아주 거지는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괜히 점심은 삼각김밥과 컵라면으로 때웠던 이야기, 종이컵 펑펑 쓰는 것도 아까웠고 지인이 격려차 사무실에 오겠다고 하면 화분대신 종이컵이나 크리넥스를 사오라고 했던 이야기 등등. 기껏 과거를 회상하며 핏대높여 이야기했더니, 다 듣고 나서 '허허, 과장이 심한거 아니야?'란다...과장이 아니라 오히려 줄여서 이야기한건데.
자원이 제한적인, 아주 극히 제한적인 환경에서는 선택과 집중, 린스타트업은 피할수 없는 방법이다. 이거 외에는 길이 없다고 생각하고 추진하는 조직과, 마치 부잣집 아드님 경영수업하듯이 벤처경험하는 조직과는 결과물이 다를 수 밖에 없다.
5. 결정타! 구심점을 잃다 (CEO의 교체)
그렇게 드라이브를 걸다가, 강한 의지로 구심점이 되어온 CEO가 그룹의 정기인사시즌에 교체가 된다. 참으로 신기하게도 조직분위기는 한순간에 바뀌고, 모두들 익숙한 문화로 돌아간다. 그러면서 구성원들은, 본인은 노력하지 않고 상사만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 수평문화를 그리워하며 불만을 쌓아간다. 여전히, 임원이 되는 꿈은 버리지 않으면서...
대기업은 뭘해도 안된다는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각 조직의 특성과 환경에 따라 최적의 기업문화는 따로 있는 것 같다는 이야기다. 또한 그 조직의 특성과 환경에 맞는 사업거리도 따로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그 '대기업 문화'는 미래의 사업환경 변화에 극히 취약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 '대기업 문화'는 외부변화에 빠르고 적절하게 대응하기 보다는 내부변화(CEO변경, 조직변경 등)에 빠르게 적절하게 대응하는데 최적화되어 있어 보인다. 외부 환경변화에 대처하지 못해서 지구상에서 사라졌을 것이라는 맘모스는 현재에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