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협업툴에 다 있는 숨은 기능
예전에 대기업에 다닐때, 빠르고 편안한 소통과 공유를 위해 우리조직에서만 slack을 쓰도록 한 적이 있다. 대기업이지만 회사특성상 비교적 연령대들이 낮았으므로 신문물(!)에 대한 저항의식은 없으리라 생각했고, 사용법도 쉽게 익히리라 생각했다. 프로젝트별로 채널을 만들고, 각 프로젝트별로 커뮤니케이션할 일이 생기면 일단은 슬랙을 통해서 소통하도록 한 것이다. 기존 방식대로라면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 별도를 회의를 잡아야 하고, 참석자들의 일정을 맞추다보면 당연히 소통시점에 늦어질수 밖에 없었다. 중대한 이슈일 경우 면대면으로 모여서 함께 고민할 필요가 있지만, 사실 대부분의 이슈는 서로 내용을 확인해주면 될 일이다.
그런데 사용법을 못익혀서도 아니고, 저항의식이 있어서도 아닌데 의외로 활성화되지 못했었다. 원인을 추정해보니 이랬다. 대기업의 조직구조에 익숙해온터라 소소한 내용이라도 파트장이나 팀장 등 상급자의 사전승인없이 임원에게 알려지는 것이 부담이 되었던 것이다. 생각치도 못한 일이었다. 꼰대 파트장이나 팀장이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왜 팀장인 나를 건너뛰고 보고하냐'고 생각할 팀장은 없었으나 '내가 직접 슬랙에 올리면 팀장님이 기분나빠하지 않을까'하는 팀원들이 우루루 있었던 것이다.
한번은 이런일이 있었다. 회식을 할일이 있었고, 가능한 일정을 물어오길래 몇개의 날짜를 주면서 "이런 소소한거에 시간쓰지말고 슬랙에 몇개 일정올려서 의견받는게 낫지않아?"라고 의견을 줬다. 결국에 그 직원은 내 의견을 따라 슬랙을 통해서 소통을 하긴 했다. 하지만 슬랙을 통해 일정을 소통하기 전에, 한명한명 찾아다니며 일정을 확인했던 것이다. 조직문화상 한명한명 다 쫓아다니며 일정을 물어보는 성의는 보여야겠고, 한편 임원이 의견을 냈으니 어쩔수 없이 그 말도 따르는 모습을 보여야겠던 것이다. 즉, 편의를 위해서 슬랙을 사용하라는 했던 내 제안이 오히려 업무부담으로만 남은 것이다. 그걸 보고나서는, 더이상 슬랙 등 협업툴 사용을 독려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slack의 숨은 기능이 뭐라는 거야'하며 의심하지마시라. 여기까지는 slack의 숨은 기능과는 아무상관없다.)
세월이 흘러 스타트업에 몸담고 보니 당연스럽게 slack을 쓰게 된다. (이건 뭔 다른 세계인지, 바로 옆에 앉아서도 slack으로 이야기를 한다.) 내용에 따라 많은 채널들이 유지되고, 많은 소통들이 일어난다. 일을 한참하다가 보면, 또 회의를 하고 나와서 보면 수많은 내용들이 쌓여있고, 중요한 이야기도 있지만 소소한 이야기들이 대부분이다. 한번에 우루루 확인하고, 필요한 내용은 의견을 내고 아닌 것들은 그냥 읽고 만다.
그러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1명의 slack활동성이 눈에 띄게 활발한 것이다. 쉽게 표현하면, 온갖 주제에 다 끼어들고 있었다. 누군가 글을 올리면 거의 빠짐없이 반응하고 1등으로 반응을 한다. 이건 슬랙만 들여다보고 있지 않으면 나올수 없는 반응이다. 아이러니한것은 본인의 업무와 직접적 관련이 없는 내용에는 1등으로 반응을 보이고, 정작 본인이 처리해야할 일에는 반응을 안보인다는 것이다. 회사가 작아서 한명한명의 업무를 다 알고 있으니 망정이지, 내가 세부적으로 돌아가는 걸 다 알수없는 큰 회사의 관리자였다면 저 친구가 굉장히 회사일에 열정적이군 정도로밖에는 판단할 수 없었으리라.
그 1인은 평소에 "일을 잘하고 싶고, 그래서 열심히 하는데 왜 성과가 안나오는지 모르겠다. 그건 일이 너무 많아서 인것 같다"고 주장해왔었다. 그래서 조심히 살펴보게 되었다. 실제로 목이 빠질듯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손은 쉴새없이 키보드를 두드려대며 열심모드였다. 하지만 그 대부분이 슬랙에 글을 남기는 것이었나보다. 슬랙에 빠르게 반응하느냐고 정작 본인의 업무에는 집중하지 못하고, 그러다보니 본인 업무는 개판 1초전으로 만들어놓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slack의 숨은 기능은 이것이다. 활발하게 소통하는 것과 본인 업무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을 구분해 낼 수 있게 해준다. 겉으로 보기에는 모두 컴퓨터 앞에서 집중하여 일하고 있어 보이기 때문에 아무 문제 없어보이지만, 대체 뭐에 집중하고 있느냐를 간접적으로 볼 수 있게 해준다. 슬랙을 열심히 하는 것이 업무를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착각이다.
쓰고 보니, 슬랙을 감시의 목적으로 쓰느거냐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한명 한명이 일당백을 해줘야 하는 스타트업의 입장에서 보면, 단 한명이 집중하지 못하면 그 업무를 다른 직원이 해야 하기 때문에 민감할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