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보그가 되어 모든 개체가 연결되는 세계에서 우리는 다양한 미래를 그린다. 그리고 그 미래에기존 관계들은 극적인 변화를 이루는 듯 보인다. 의사소통이 가능해진 나와 사이보그 뽀삐의관계처럼 말이다. 사이보그 기술은 그 구성 요소인 유기체와 외인성 요소의 위상을 평등하게 바라본다.모두가 결합 가능하고 또 같은 위상을 지닌다는 이 기술의 특성은인간-동물, 인간-사물 사이에 경계를 허물고, 나아가 주체와 객체로 나뉘고 구분되던 기존 이분법세계의 붕괴를 초래한다. 나아가이 같은 기술적 특성이 불러온 변화는기술 현상에만 머무르지 않고 정치사회적인모습을 띄고,그 지점에서 각양각색의 이야기가 시작된다.-마치 노벨이 폭약의 안전한 사용을 위해 '최초의 고체형 폭약' 다이너미이트를 발명했지만, 애초에 기대했던 건설 및 광산 사업에서의 사용보다 전쟁에서 더 큰 활약을 보인 것과 같다.
이번 화에서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사이보그 기술로 인해 예정된 거대한 변화들 사이에서 어쩌면 외면되어 온 정치사회적 이야기이다. 바로 사회적 약자로 분류되어 온 여성, 장애인, 퀴어 그리고 동물에 대한 이야기이다.
사이보그 기술의특성으로 인한'모든 구성요소들의 위상적 평등'과 '기존 이분법 세계의 붕괴'는 여성, 장애인, 퀴어 심지어 동물에게도 해방을 약속하는 듯하다.하지만 그 약속의 이면에는 '기술 생산자'와 '기술 소비자'의 권력구도, 새로운 이분법이 고착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의문이 존재한다.
사이보그의 진정한 모습은 무엇일까?: 사이보그는 온갖 약한 이들을 포용하는 기술이 될 수 있을까? 아니면 약한 이들에게 허락되는 제한적인 기술의 자비일까?
노벨의 예처럼 기술의 모습은 향유하는 자들이 만들어간다. 그렇기에 모든 약한 이들의 사이보그, 우리 모두의 사이보그 기술의 실현에 대해 우리의 노력은 필수조건인 셈이다. 구체적으로 이 노력 즉 '모두를 위한 사이보그의 전제'는 3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능동성', '연결되는 서로에 대한 이해' 그리고 '사이보그에 대한 재정립'.(이 세 가지가 충족되지 못한다면, 그렇지 않은 부분에서 사이보그는 하나의 기술 권력으로서 작용하게 될 것이다.)
첫 번째 전제 '능동성'은 적극성, 참여성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대표적인 예로 사이보그 학자이자 사회주의 페미니스트 운동가인 도나 해러웨이의 선언¹을 들 수 있다. 해러웨이는 "여신이 되기보다 사이보그가 되겠다"라고 선언했다. 해러웨이는 여성을 사이보그 기술의 '능동적 기술 사용자'로 상정하고 기존 이분법적 사회의 모순을 꼬집는다. 나아가 사이보그 기술을 통해 전통적 관념의 해체에 대해 당위성을 부여한다. 그녀의 태도에서 능동성을 관찰할 수 있는데, 여기서의 능동성은기술로 인한 변화에 본인이 주도적으로 참여함은 물론, 기술의 특성이 가지고 올 정치사회적 양상들에 대한 적극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
두 번째 전제 '연결되는 서로에 대한 이해'는연결되는 객체 간 이해뿐만 아니라 잠재적으로 연결 가능한 모든 객체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 일례로 인공와우를 착용한 청각장애인에 대해서는 청각장애인-인공와우 상호 간의 관계뿐만 아니라 제삼자로서 우리가 그 사이보그를 바라보는 이해를 포함한다. 우리는 보통 인공와우와 같은 보조기구의 착용을 '정상성의 회복'을 위한 기술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 결합의 이유는 제각각이다.² 인공와우는 일반인의 청각 같은 소리를 듣게 하는 기능이 아닌, 소리를 전기신호로 바꿔 이해 가능하게 돕는 기구로 일부 환자들의 경우 삽입 자체의 불편을 호소하고, 착용 시 전달되는 청각신호에 대한 스트레스 등 문제를 겪는다. 보조기구와의 결합이 정상성, 정상적 신체 기능을 제공하지 않을뿐더러, 보조기구 결합의 이유가 단순히 정상성을 위한 결합에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우리는 이 같은 연결에 대한 민감하고도 섬세한 이해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래야만 기술은 자신의 몸뿐만 아니라 모든 유기체에 적용될 때에도비로소 '괴상함'이 아닌 '우리'를 구성할 수 있다.
1번과 2번 전제가 모두 충족되었을 때 세 번째 전제가 논의된다. '사이보그의 재정립'은연결되는 모든 객체의 다각적 입장이 반영된 개념의 정립을 일컫는다. 기술적 개념의 재정립이 아닌, 정치사회적 사이보그의 재정립이며, 이 단계에서 사이보그의 필요, 결합 방법, 결합 전 상태 등을 따지지 않는 온전한 하나의 객체로서 이해되는 각각의 사이보그들이 등장하게 될 것이다.그리고 사이보그는 기술 생산자의 시선으로 재단되지 않고, 사이보그 관계에 있는 객체에 의해 스스로 정의된다. 뽀삐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사이보그가 되었어도, 사이보그가 되어 재정립된 그 존재의 위상은 이전의 뽀삐와 더 이상 같지 않다. 품종을 위한 인위적인 종간 교배, 단순 감정에 의한 폭력, 타 객체에 의한 생사여탈 등이 적어도 사이보그 뽀삐에게는 적용될 수 없다. 사이보그 기술의 존재로써 현현하면 '객체에 대한 권리' 역시 부여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종래에는 사이보그 동물뿐 아니라 연결 가능성을 가진 객체인 동물 전체로 권리의 부여가 이뤄지지 않을까?)
온갖 것들이 사이보그가 되는 미래, 사이보그가 우리 모두를 위한 기술이 되기 위해서는 기술의 발전만큼 치열한 인문학적 노력 또한 뒷받침되어야 한다. 단순히 기술을 추종하는 '기술 소비자'가 아닌 '능동적 기술 사용자가 됨'에서 모두를 위한 사이보그는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