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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살이-열네달차(22.10월)

마하트마 간디-백범 김구

by 소전 India

지난 10월 2일은 인도의 아버지, 마하트마(위대한)간디 선생의 생일입니다. 간디 선생은 1869년 인도의 포르반다르(인도 서북부 구자라트 인근)에서 명문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1887년(18세)에 영국으로 유학을 가서 법학을 전공하였습니다. 1891년(21세)에 변호사 자격증을 따고 인도로 돌아와 변호사를 개업하였으나 운영이 여의치 않아 1893년(23세)에 남아공에서 법률회사를 운영하고 인도를 오가며 남아공에 사는 인도인들의 인권과 독립운동을 하였습니다. 51세가 되던 해인 1920년 인도로 돌아오면서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합니다. 1947년(78세)에 독립을 맞이하나, 1년도 채 되지 않는 1948년 1월 30일 79세의 나이로 암살을 당하여 생을 마치게 됩니다. 간디 선생은 비폭력(아힘사;불살생), 무저항 운동(사티아그라하), 금욕(브라흐마차리아), 무소유(아파리그라하)를 중요시하였습니다. 이런 사상을 기반으로 국민계몽 운동을 통해 인도를 하나로 묶고, 소금행진(1930년) 등 다양한 형태로 운동을 벌여 마침내 인도의 독립을 이루게 됩니다. 또한, 힌두교, 무슬림, 자이나교 등 여러 종교간 평화와 공존을 추구하였으나, 힌두교 극단주의자인 ‘나트람 고드세’(1910-1949)가 쏜 총탄에 의해 비통한 죽음을 맞게 됩니다.

차르카를 돌리고 있는 간디(출처 : 위키피디아)

이보다 더 험난한 인생을 사신 분이 바로 우리나라에도 있습니다. 바로 백범 김구선생이십니다. 제가 30대 직장생활을 하며 방황하던 때에 힘을 얻었던 글귀가 있습니다. 바로 ‘답설야(蹹雪野)’입니다.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이리저리 함부로 걷지 마라.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국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나니’.


서산대사가 지은 시로 김구 선생이 탈옥하여 마곡사에 은신할 때 이 글귀를 접했다고 합니다. 김구 선생은 마하트마 간디보다 7년이 늦은 1876년 북한 해주의 백운방 텃골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몰락한 양반가의 후손으로 태어나 힘겹게 과거를 보았으나 편파적인 심사로 낙방하고 17세 이른 나이에 동학에 입문하였다가 스승인 고능선을 만나 체계적인 학문을 배웠습니다. 20세인 1896년에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 주막에서 일본인을 명성황후 시해 범인으로 지목하고 살해합니다.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탈옥하고 다시 계몽운동을 하면서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하게 됩니다. 1919년 3.1운동이후 일본의 탄압이 시작되자 상해로 이주, 임시정부의 경무국장을 맡으며 파란만장한 중국에서의 독립운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50세가 되던 해인 1926년에 임시정부 국무위원의 주석으로 임명되고 1936년에는 광복군을 결성하게 됩니다. 68세인 1945년에 독립이 되어 한국으로 귀국, 남북 단일 정부를 세우기 위하여 노력하던 중 1949년 6월 26일 서울 경교장에서 포병중위인 안두희에 의하여 암살을 당하게 됩니다.


간디와 김구선생의 일생을 보면서 두 분은 어찌 이리 닮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역사에 ‘만약이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지만, 만약 이 두 분이 비운을 당하지 않고 더 사셨다면 어땠을까 생각을 해 봅니다. 두 분 모두 운명적인 삶과 정면으로 세상에 부딪혀 산 공통점도 있지만, 의외로 다른 부분도 많습니다.

img.png 김구선생님 국민장 행렬(49.7.5, 출처 : 백범김구선생 기념사업회)

우선 독립운동의 출발점입니다. 간디 선생은 23세에 인도에서 법률사무소를 개업하였으나 운영이 원활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남아공은 영국의 철도건설, 면화산업으로 인한 노동력이 필요해 약 15만 명의 인도인들이 진출해 있었습니다. 인도인 사업가의 요청을 받고 남아공 법률사무소 운영을 위하여 기차를 탑니다. 1등석 표를 샀고, 유색인종이지만 영국변호사 자격증을 가진 나름 고귀한 신분이라고 자부를 하였으나, 남아공의 기차는 이런 사정을 봐주지 않았습니다. 1등칸에서 쫓겨나고 호텔에서도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로 체크인을 거부당했습니다. 23살의 자신만만했던 청년은 이 사건을 계기로 인종차별에 맞서 인도인들의 권리를 찾는 운동을 시작합니다.


이에 비하여 백범 선생은 그야말로 질풍노도의 청년기를 보냅니다. 17세에 과거와 동학 입문을 실패하고 인연으로 만난 성리학 화서학파의 후조(後凋) 고능선(高能善)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면서 새로운 지식체계를 정립하게 됩니다. 배움을 계기로 견문을 넓히고자 청나라를 가기로 했으나, 을미사변, 의병봉기로 마음이 뒤숭숭하여 고향으로 발길을 돌립니다. 황해도 외곽의 치하포 주막에 묵는 중 한국인 행세를 하는 ‘스치다 조스케’라는 일본인을 국모를 시해한 범인으로 알고 살해합니다.(실제 ‘스치다 조스케’의 직업은 백범일지에 일본군 중위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재판기록이나 당시 기사를 검색하면 일본 상인이라고 되어 있어 이견이 있음) 당시 백범 선생은 ‘처단할 것이냐, 그만둘 것인가’ 고민하던 순간에 “과단성이 없다면 모든 일이 쓸데없다 하시며 가시를 잡고 나무에 오르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나,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마저 놓는다면 가히 대장부로다” 라는 고능선 선생의 말씀을 되새기며 용기를 얻었습니다. 사형언도를 받았지만 국모시해범을 살해했다는 여론과 고종황제의 도움으로 감형을 받아 도망치면서 독립운동의 길을 걷게 됩니다. 사소한 출발점이지만 두 분 선생들이 각자 처한 환경은 다르나 인생의 변곡점은 늘 중요하면서도 의미가 많은 것 같습니다.


둘째로 투쟁방식입니다. 간디선생은 남아공에서 영국인과 남아공 경찰들을 상대하며 폭력으로 맞서는 것은 효과가 없고 피해가 크다고 판단했습니다. 저항하지 않고 수모를 당하는 것을 널리 공유하고 알리는 방식의 운동이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진리를 뜻하는 사티아(satya)와 노력을 뜻하는 ‘그라하(Agraha)’의 합성어인 ‘사티아그라하’는 비폭력 저항의 상징으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대표적인 사례로 소금행진을 들 수 있습니다. 소금행진은 1930년에 대공황으로 경제적 타격을 입은 영국이 소금법을 만들어 인도인들의 소금 채취를 금지하고 영국산 소금만 수입해서 먹으라는 반강제 독점법이었습니다. 독점도 그렇지만 소금에 붙는 세금도 인도인들에게는 큰 부담이었습니다. 간디는 인도 서북부에 위치한 구자라트 아쉬람에서 단디까지 약 380km 떨어진 길을 행진하며 바닷물을 끓여 직접 소금을 만드는 운동을 벌입니다. 1930년 3월 20일 78명으로 시작하였으나, 4월 6일 마칠 때쯤에는 6만 명이나 모였고 행사가 끝난 후에는 간디를 비롯한 참여한 사람들이 모두 경찰에 체포되었습니다. 소금행진은 비폭력 투쟁에 대한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고 합니다.

단디에 도착해서 소금을 집어느는 모습(출처 : 위키피디아)


간디 선생의 비폭력 운동에 대비하여 김구 선생은 항일 무장 투쟁을 하게 됩니다. 치하포 사건부터 1931년 상해 임시정부가 조직한 한인애국단을 맡아 이봉창, 윤봉길, 이덕주, 유진석, 유상근, 최흥식 의사 등과 수많은 무장투쟁을 합니다. 1940년에 중국 장개석과 협력하여 조선광복군을 창설합니다. 1945년 8월에는 미국 OSS(미국 전략사무국, Office 0f Strategic Service, CIA 전신)과 합동으로 50여명의 대원이 미군 잠수함을 타고 서울에 침투한다는 작전훈련까지 하였으나, 원자폭탄 투하와 일본군의 항복으로 무산 됩니다. 8.18일이 작전일이었는데 8.15 해방으로 실행하지 못한 것을 두고 김구선생님이 애통해 하는 장면이 눈에 선합니다. 폭력과 비폭력이 정반대의 운동이지만, 옳고 그름을 오늘의 기준으로 본다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200년 동안 통치한 비교적 온건한 영국의 식민지 지배방식과 잔인한 일본의 조선식민 통치에 대한 차이점 일지도 모릅니다. 또한, 투쟁방식에 있어서 여러 가정과 추측이 있지만 저는 두 선생들이 당시의 상황과 여건에 맞는 최적의 전략을 선택했다고 봅니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김구 선생이 인도에서 독립운동을 했다면 간디 선생과 같은 비폭력 방식을 선택했을 것이고, 간디 선생이 일본과 독립운동을 했다면 무장투쟁 방식을 했을 상상을 해봅니다.


세 번째 암살과 암살자의 최후입니다. 간디 선생을 살해한 범인은 ‘나투람 고두세’라는 사람으로 힌두 민족주의를 신봉했던 당시 38살의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인도 독립 시 간디가 힌두교도를 배반하고 무슬림을 믿는 파키스탄 개국으로 이어지는 분할에 찬성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암살 당시에도 고두세가 속한 ‘라시트리야’ 종단은 자기와 무관한 일이라고 주장했고, 암살의 배후는 과격 힌두교도의 개인범죄로 일단락 짓게 됩니다. 고두세는 1949년에 교수형을 당합니다.


반면 김구 선생을 시해한 안두희의 일생은 참으로 비굴했습니다. 안두희는 1917년 북한 용천군에서 태어나 1947년 서북청년회에 가입하여 극단적인 반공주의자가 되었고 육사 8기 졸업 후 포병소위가 되었습니다. 32세가 되던 1949년 6월 26일 경교장 서재에서 선생을 암살하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러나 6.25전쟁이 발발해 풀려나고 군인으로 복귀하였다가 강원도에서 군납업체를 운영했습니다. 그는 4.19혁명 이후 민족정기 회복을 부르짖는 청년들에게 평생 맞고 쫒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1965년에는 곽태영에게 칼을 맞았고, 1987년에는 권중희에게 정의봉을 맞았고, 같은 해에 노송구에게 각목으로 얻어맞기도 했습니다. 계속하여 진술과 번복, 거짓을 일삼다가 1996년 10월 23일 자택에서 박기서의 정의봉에 맞아 피살 당합니다. 당시 79세였습니다. 암살 배후를 밝히기 위하여 국회나 위원회, 민간인의 수많은 노력이 있었음에도 끝내 밝혀내지 못하여 우리세대는 역사에 큰 짐을 남긴 것 같습니다. (관련내용은 KBS 명작다큐 백범김구 1부 나의길, 2부 나의소원 참고, 2012년)

박기서 선생과 정의봉(안두희 살해죄로 형을 받고 정의봉을 백범기념관에 지증하는 모습)


네 번째로 두 분 선생의 후손들입니다. 사실 후손들의 이야기가 궁금했습니다. 저 같은 경우에 독립운동도 아닌 직장생활이 바쁘다는 핑계로 가족을 돌볼 여유가 없는데 ‘이 분들은 어떻게 했을까?’와 후손들은 ‘어떻게 잘 살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있었습니다. 간디선생은 국민회의당의 지도자로 인도의 독립을 이끌었으나, 독립 후에는 자와할랄 네루 총리집안이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간디 선생은 장남(하릴랄 간디, 1888-1948), 둘째(마닐랄,1956년 사망), 셋째(람다스, 1969년 사망), 넷째(뎁다스, 1957년 사망)으로 네 명의 아들을 두었습니다. 장남은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으나, 나머지 세 아들은 아버지의 독립운동을 적극 도왔고 몇 차례 투옥되기도 하였습니다. 둘째는 구자라트주에서 영어 주간지를 운영했고, 넷째는 전국적인 일간지 힌두스탄 타임스 편집인을 지냈습니다. 현재 간디 선생의 후손 중에서 정관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은 네째 아들 넵다스의 막내아들 ‘고팔 크리쉬나 간디’가 있습니다. 행정고시에 합격하여 공무원으로 근무하다 2007년 웨스트 벵갈 주지사를 했습니다. 둘째 아들 마닐랄 간디의 아들인 ‘아룬 마닐랄 간디’는 현재 미국에서 비폭력 연구소장을 하며 할아버지의 비폭력운동을 알리고 있습니다. 현재 집권당인 모디총리가 정권을 잡기전인 2014년 이전에는 네루-간디 가문의 전성기였습니다. 네루-간디 가문의 간디가 사실 마하트마 간디의 후손인줄 알았는데 초대 네루총리의 딸인 인디라 네루가 하원의원 페로제 간디(간디 선생은 모한다스 가문이라 관련 없음)와 결혼하여 ‘간디’라는 성을 추가했다고 합니다. 김구 선생은 장남 김인(1917-1945), 차남 김신(1922-2016) 두 명의 아들을 두었습니다. 차남 김신은 6대 공군참모총장과 교통부 장관, 전 백범기념관장을 역임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묘비명입니다. 간디 선생은 현재 델리에 있는 간디박물관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세상이 망할 때가 되면 나타나는 일곱 가지 현상에 대하여 설명한 내용입니다. 이 글은 간디가 암살당하기 전 손자인 아둔 마릴랄 간디에게 남겨준 글이라고 합니다. 간결하면서도 개인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회의 구성원에게 적용될 주의의 문구인 것 같습니다.

(1) 원칙 없는 정치(Politics without principle)

(2) 노동 없는 부(Wealth without work)

(3) 양심 없는 쾌락(Pleasure without conscience)

(4) 인격 없는 교육(Knowledge without character)

(5) 도덕 없는 상업(Commerce without morality)

(6) 인간성 없는 과학(Science without humanity)

(7) 희생 없는 신앙(Worship without sacrifice)


김구선생의 영전은 서울 효창공원에 있습니다. 간디 선생처럼 화려하지 않지만 독립운동의 열정과 민족 사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임시정부 재정부장을 지내신 조완구 선생이 국민장 때 지으셨다고 합니다.


大韓民國臨時政府 主席 白凡 金九之墓

백범 김구 선생은 사천이백구년 병자 음 칠월 십일일 자시

해주 백운방 터골 안동 김순영 현풍 곽낙원의 외아들로 나

해주 최준례 맞어 인, 신 형제 두니라.

(중략)

백범일지의 나의 소원은 민족의 말이러라.

긔축 유월 이십육일 오시 서울 경교장 서실에서 총 맞으니 칠십사세라.

항공 중령 신이 이으니 한간 집 한 뙈기 밭 물림 없더라.

국민장의로 칠월오일 서울 효창공원에 모시니 태백의 정기가 서리더라


단기 사천이백팔십이년 십일월 이십사일

백범김구선생국민장의위원회 세움


지난 10월2일 간디 선생의 생일부터 쓰기 시작한 글을 오늘 마무리를 하였습니다. 마침 오늘은 김구선생을 시해한 민족의 반역자 안두희가 박기서 선생의 정의봉에 맞아 죽은 날입니다. 역사의 준엄한 심판은 누구도 피해가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시대의 아픔과 고난을 극복하면서 묵묵히 길을 걸어가신 두 분의 힘든 삶이 참으로 대단함을 다시 느낍니다. 두 분의 삶과 못 이룬 꿈은 물론, 과거를 현재 관점에서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선도 어려웠습니다. 실제 김구 선생님의 여러 명언 중 가장 마음깊이 들어오는 문구는 바로 나의 소원 중에서 문화의 힘과 세계무대에 등장할 날에 대한 부분입니다. 김구 선생님의 바람대로 우리나라는 세계에 우뚝 서는 자랑스러운 나라가 된 것 같습니다.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로 말미암아서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우리 민족이 주연 배우로 세계무대에 등장할 날이 눈앞에 보이지 아니하는가?”


10.26일에 개봉되는 이일형 감독, 이성민, 남주혁 배우가 열연하는 ‘리멤버’ 예고편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과거에 사로잡힌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친일파 대학교수가 복수를 하는 주인공(이성민)에게 죽임을 당하면서 하는 변명의 말입니다. 과거의 아픈 역사를 되새기며 앞으로는 전철을 밟지 않고 김구 선생님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서 우리는 과거 역사의 소중함과 소명을 다시 알아야 하겠습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끝.


2022년 10월 인도에서 소전(素田)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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