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에서 이사하기
집주인, 운전기사, 메이드. 이 세 사람을 잘 만나면 인도에서의 삶이 순조롭다고 합니다. 근 2년 간 살며 별다른 이슈가 없어 다행이라고 여기는 시점에 집주인에게서 집을 비우라는 통보가 왔습니다. 코로나가 끝나고 인도 경기가 살아나자 각 국의 해외 주재원들이 몰려오면서 집값이 상승하는 것의 여파입니다. 인도는 우리나라처럼 전세 제도가 없습니다. 집이나 사무실이나 월세를 내고 임대하는 시스템입니다. 우리나라처럼 전세권 보호 법률도 없고, 공증 제도가 있기는 하지만 소송 기간도 길어서 유명무실합니다.
이렇다 보니 집주인들은 2~3개월 동안의 보증금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고, 3달치 월세를 선불로 받기도 합니다. 또 계약 기간 내로 편하게 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계약서에 Locking period(일종의 의무약정기간)이라고 해서 계약일 후에 의무적으로 살아야 하는 기간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원래는 코로나가 창궐할 때 계약하고 살다가 Locking period 안에 본국으로 돌아가는 경우 집주인을 보호하기 위하여 만들어 놓은 제도였습니다. 하지만, 월세가격이 상승하니 집주인들이 담합해서 세입자를 내쫓고 더 높은 월세를 받으려는 목적으로 악용되기도 합니다. 때로는 집주인이나 결혼한 자녀가 들어와서 산다고 하거나, 집이 매매가 되었다고 Locking period기한이 지나자마자 바로 통보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통상적으로 집주인의 부동산 중개인과 집을 구하려고 하는 사람의 부동산 중개인이 서로 합의를 보면서 진행을 합니다. 중개수수료는 한 달 치 월세를 받습니다. 주재원들의 월 임차료가 1.5 랙(230만 원)에서 2.5 랙(370만 원)이고, 보통 인도사람들의 월급이 3만 루피(약 45만 원)인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수입입니다. 집주인과 중개인에게 유리한 시스템이다 보니, 중개인들이 집주인을 부추겨 세입자를 바꾸는 경우도 있고, 집주인들이 담합을 해서 임대가격을 올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4월에 갑자기 집주인으로부터 월세 인상 요청을 받았습니다. 만약 전체적으로 월세가 내려가면 우리 집 월세를 인하해 줄 수 있긴 한지, 또 계약기간이 남았고 해마다 5%씩 월세가 인상될 텐데 무슨 말이냐며 거부의 의사를 표현했습니다. 사실 지금 사는 집도 임차료 상한액을 넘겨 일정 부분은 자비로 충당하고 있어 부담이 많이 되었습니다. 또 지인들 사이에서 임대료가 올라 살고 있는 집을 쫓겨난다는 소식이 간간이 들려왔습니다. 정확하게 한 달 후에 문자로 연락이 왔습니다. 월세 인상 없이 계약서에 있는 대로 한 달안에 나가라는 말이었습니다. 계약서를 찬찬히 살펴보니 집주인 말대로 Locking period가 끝나면 집주인이나 세입자가 특정기간 안에 통보를 할 수 있다는 규정(Notice period)이 있었고, 구체적인 사유는 명시되지 않았습니다.
회사 내 변호사와 주변 지인을 통해 알아본 바, 일단 계약서대로 이행해야 하며, 기한 내에 이사를 하지 않으면 보증금이나 선급된 월세를 일일 차감 또는 집주인과 협의하여 결정한다고 합니다. 급한 대로 새집을 알아보려고 하니 정말 당황스러웠습니다. 집주인으로부터 한 달 시간을 주었으니 집을 비우라고 계속된 문자와 연락이 오는데 황당함 그 자체였습니다. 어쩔 수 없이 새로운 집을 얻기로 했습니다. 이사 갈 집을 구하려 하니 막막했습니다. 파견 기간도 7월 말로 두 달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또 파견 연장이 확정되지 않은 상황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답답했습니다. 일단, 이사 날짜는 정해졌고 중개업자를 통해서 알아보기로 했습니다. 인터넷에서 집을 소개하는 사이트가 있지만, 부임 초기 경험상 집주인 눈치만 보는 중개업자에게 일을 맡기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순차적으로 몇 개의 집을 보았습니다. 수준에 비해 집값이 매우 비쌌지만 주인들은 높은 수요를 믿고 배짱을 부립니다. 유리한 위치에 있는 집주인들과 중개인이 해외 주재원들에게 현지인들보다 비싸게 월세를 부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현지인들은 저렴하게, 외국인은 보다 비싼 이중적인 가격 구조가 이해는 되는 한편 눈뜨고 코 베이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집을 둘러보고 입주 의사표시를 하면 집주인들과 대면 또는 화상으로 만나 결정을 합니다. 집을 구하는 사람들이 약자이다 보니 어이없는 경험을 종종 듣습니다. 계약이 종료되어 집을 나가야 하는데 2~3개월치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또, 구석구석 점검을 한 후 모든 하자를 세입자 책임으로 몰아 과도한 비용을 청구하는 사례가 있기도 합니다. 우리 집에도 집주인이 세 명의 직원을 보내 미리 살펴보았습니다. 한국에서 전세를 살 때는 집주인이 와서 문짝 긁힌 것이며 벽지 뜯어진 것 등등 모든 것을 깨알같이 적어 비용을 청구당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집주인 개개인별 차이는 있지만 남의 집살이는 인도나 한국이나 엇비슷해 보입니다.
새로운 집을 이삿날 5일 전에야 계약했습니다. 살고 있는 집은 집세가 3개월치 선불이었습니다. 짐을 빼고 열쇠를 전달하면 살지 않은 한 달분을 돌려받기로 했습니다. 나가라고 재촉은 밥 먹듯이 하더니 막상 짐을 빼고 열쇠를 전달해도 입금은 하지 않았습니다. 하루가 지났습니다. 입금하지 않으면 짐을 다시 원래 살고 있는 집으로 옮기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소송하겠느니 하며 강경하게 나간 후에야 입금되었습니다. 다행히 집 inspection(검사)을 핑계 삼아 월세를 깎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화장실 가기 전과 나온 후의 상황이 다르구나’를 떠 올리게 합니다.
드디어 짐을 꾸리게 되었습니다. 한국의 경우에는 부엌 담당, 전자제품 담당, 의류담당 등 각 분담업무별로 일사불란하게 짐을 싸고 새집으로 옮기는 데 하루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집의 구조가 다를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 이사하는 사람의 요구에 맞게 비교적 정확하게 자리를 잡고 짐을 옮깁니다. 인도는 짐을 싸는데 하루, 이동하여 짐을 푸는데 하루로 2일이 소요됩니다. 인건비가 저렴한 덕에 10여 명의 인부들이 옵니다. 아침부터 하루 종일 짐 포장을 합니다. 그 흔한 전동드릴도 없이 일일이 나사를 풀며 해체하고 나름 꼼꼼하게 박스에 넣고 포장을 합니다. 사다리차도 없이 수레와 엘리베이터로 짐을 옮깁니다.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하는 경우에는 하루에 끝나기도 하지만, 대략 이틀이 걸린다고 보면 됩니다. 새로 들어갈 집이 가까웠지만 집주인의 허가가 나지 않아 다음날 짐을 옮기기로 했습니다. 인도에서는 살던 집에서 짐을 빼거나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가는 경우에 집주인들의 허락이 관리사무소에 도착한 후에야 이동이 가능합니다.
새로운 집에 짐들이 도착했습니다. 짐을 풀기 전 미리 도난방지를 위해 여러 대의 CCTV를 설치합니다. 일일이 박스 번호를 대조하며 미리 정한 방 위치로 박스를 옮깁니다. 큰 짐들은 설치를 맡기지만 옷이나 기타 자잘한 짐들은 박스채로 이사를 종료합니다. 왜냐하면 옷은 서랍에 쑤셔 넣기가 일쑤고 한국처럼 세세한 정리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이유로는 분실의 위험을 방지하기 위함입니다. 식탁이나 침대 같은 경우 조립하는 데에도 서너 명이 둘러앉아 어떻게 할지 방법을 한참이나 고민합니다. 한국의 가정집마다 있는 전동드릴 한 대 없이 송곳 한 개로 돌려 쓰며 조이고 풀며 맞춰나갑니다. 또다시 우리나라에서 너무나 편리하게 살았음을 떠올린 하루였습니다.
이사를 하고 보니 인도 사람과 우리가 청결함에 대한 관점이 참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도 나이가 조금 있는지라 우리나라도 먹고살기 바빴던 7, 80년대 청결에 대한 무지가 있었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도에서의 청결 기준은 상상 이상으로 낮습니다. 손이 닿는 눈에 보이는 것만 치우고 그 뒤로는 쓰레기가 수북하게 쌓여 있습니다. 계속 문지르고 있는 걸레는 빨지도 않아 더 더러워질 것 같습니다. 이사 전 호언장담한 딥 클렌징 (deep cleansing)은 무엇이었을까요? 입주 청소가 끝났지만 다시 정리하고 청소하는 번거로움은 당분간 지속될 것 같습니다.
이사 후에도 여러 가지 일이 정리할 것이 있는데, 약속에 대한 개념의 차이도 만만치가 않습니다. 한국은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부분입니다. 어기는 경우, 사람에 대한 판단, 가족, 직장에서의 대접 등 여러 가지 애로사항이 생기기 때문에 대부분 약속을 지키려고 합니다. 또 한국에서는 기망하는 행위를 죄악시하여 약속의 불이행에 대한 제재수단이 확실합니다. 반면 인도사람들은 약속을 한 후 일정이나 내용을 재확인하면 문제없다(No problem)고 합니다. 그러고는 차가 막힌다, 차가 고장 났다, 병원에 입원했다 등등 여러 가지 핑계를 댑니다. 인도에서는 이러함이 모욕을 받는 것도 아니며 여러 분야에서 나타나는 일상다반사라고 합니다. 원인으로 세상 만물의 본질이 변화하는데 참이 거짓이 되고, 거짓이 참이 된다는 힌두교리 때문이라고는 합니다. 한국 사람들의 눈에도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하고선 모르쇠로 일관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고 일을 마무리해주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이런 일은 거의 없습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고, 인도에 오면 인도 법을 따르는 것은 맞지만 솔직히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아직도 감이 서질 않습니다. 인도 사람들의 약속에는 항상 '형편이 허락하면'이라는 전제를 깔아야만 한다고 하는데 아직도 이것을 받아들이기가 만만치가 않습니다.
아직 정리할 짐도 많고 손 볼 곳도 많지만 일단 무사히 안착을 했습니다. 혹시 지금 집을 구하거나, 임차인의 신분으로 인도에 살고 계시다면 계약서를 꼼꼼하게 살펴보는 것을 권해드립니다. 제가 당했던 locking period나 notice period 규정이 어떻게 되었는지 숙지를 해야 대응이 편할 것 같습니다. 인도살이에 가장 큰 애로사항 중 하나는 바로 주거 불안입니다. 현재 인도가 가진 임대차 관련 법률이나 제도는 일방적으로 집주인에게 유리하도록 되어있습니다. 일정기간 근무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주재원들은 불리한 약자의 입장으로 지낼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사실 서러운 것은 내 집이 아닌 남의 집에 세를 살아야만 하는 제 처지가 아닌가 합니다. 하지만 주위 분들의 도움으로 힘든 이사를 할 수 있었고, 돌발 상황과 어이없는 여러 일을 무난히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새 집 계약과 이사가 일주일 사이에 급하게 이루어졌고, 이삿날에 한국에 면접시험이 있어 내심 걱정이 많았습니다. 면접일정과 이사를 자의로 조정할 수 없어 그대로 진행했습니다. 이사 당일에는 주위 분들의 도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짐을 싸는 첫날에는 아내의 지인분들이 도와주셨고, 둘째 날도 전날 도움 주신 분들과 직장 동료의 남편 분이 와주셨습니다. 인부들이 짐 푸는 것을 관리하고 감독해 주셨습니다. 여자들만 있던 첫째 날과 남자들이 있었던 둘째 날, 인부들의 태도가 정말 달랐습니다. 상류층은 논외라고 하지만 인도는 여자를 정말 돌같이 보는 것 같습니다. 남녀가 유별하다는 관념이 자리를 잡고 있다 보니 여자들을 무시하고 하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남녀 문제 인식 차이는 더 알아보고 탐구하여 다음 인도살이 주제로 다뤄보도록 할 예정입니다. 어쩌면 인도에서 살아가는 것이 시간이 가면서 저절로 이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피부로 체감을 해야 이해가 된다는 것을 실감한 이사경험이었습니다. 도와주신 분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
2023년 6월, 인도에서 소전(素田)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