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사회적 동물이다. 그래서 외로움이라는 감정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며, 소속감과 그 속에서의 안정성을 요구한다. 하지만, 사회적 동물에게서 오는 그 사회성이 무조건적으로 긍정적인 결과만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잘 적응할 수 있는 사회인 것이지, 모두가 잘 적응할 수 있는 사회는 아니라는 것이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기부를 하거나, 국제적인 원조 활동을 하는 것, 환경보호를 위한 운동을 하는 것 모두 자신보다는 타인을 위한 행동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러한 행동들은 본인의 진심에서 우러나왔을 때 가장 가치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사회와 환경 그리고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것도 그들이 원하는 사회 -그들의 만족을 위한 행동-이라고 볼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강요된 봉사를 우리는 사회봉사라는 이름으로 명명하여 처벌의 한 분류로 행한다. 자발적이지 않은 봉사는 그만큼 긍정적인 요소로 보기 어렵다.
그래서 대부분의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스펙트럼을 만들고 그 규율에 따라 행동한다. 사회적으로 고립되지 않으며, 또한 대부분이 만족할 수 있는 규칙을 정한다. 그렇게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울타리 속에서 안정감을 느끼며 살아간다.
그러나, 그 울타리 속에서도 언제나 그 규칙을 수용하고 있는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 규칙이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속인 것이지, 우리가 상호 간의 합의에 이른 법 혹은 질서라고 할 수는 없다.
생각해 보자. 당신의 직장에서 형성된 직장만의 고유한 문화에 당신은 어떤 기여를 했는가? 아니면 그 문화에 녹아들기 위해 적응하고 있는가?
그래서 사회 내에는 나와 맞지 않는 사람도 있을 수밖에 없고, 내가 또 다른 누군가의 마음속에 미운털로 박혀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상대방의 상황을 이해할 줄 안다. 상황을 상대적으로 바라볼 줄 안다. 그렇기에 우리는 미운털 가득 박아놓은 사람과도 함께 살아가고 있다.
또한 어쩌면 내가 고립될 수도 있다는 일종의 두려움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 규칙을 합의하기에 있어서 나의 지장을 찍은 적은 없다만, 그 속에서 어느 정도 희생 혹은 이해가 없다면 내가 이 무리에서 이탈하게 될 수도 있다는 막연한 두려움이 있을 수 있다.
그렇기에 못마땅한 타인을 겉으로는 이해한 척하며, 하루의 대부분을 함께하더라도 고약한 감정을 내비치기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렇게 우리는 연륜을 쌓고, 감정적인 충동을 줄여간다. 어린아이들이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본인의 충동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장난감을 사주지 않는다고 울거나, 친구가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했다고 꼬집는 것. 그것은 모두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성인에게서 보일 때 우리는 부적응자라는 단어로 그들을 정의한다.
우리는 모두 다른 존재지만, 결국 같은 울타리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 그 속에서 완벽한 동화나 절대적인 합의를 이루지는 못하더라도, 서로를 존중하고 절제하며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성숙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성숙한 사람인가? 남에게 미운털을 박은 채 그들을 판단해도 좋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미운털이 박혀있어도 좋다. 그러나, 우리가 나만의 판단을 스스로 삭여 없앨 수 있다면. 각자가 흩어져있는 그 고유한 생활에 녹아들 수 있다면. 다시 말해 상대를 포용하고 살아갈 수 있을 때, 어린이와 성인의 경계를 너머 진정한 성숙의 길로 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