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자아상이 있는가?
우리는 종종 '진정한 나를 찾아야 한다'는 말을 하곤 한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가 꿈꾸는 자아상과 이미 형성된, 혹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어버린 자아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 둘 사이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을 때, 그 거리감은 마치 건널 수 없는 강처럼 느껴져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을 망설이게 만든다.
얼마 전, 친구와 인사동 골목의 작은 술집에서 가볍게 술을 마신 적이 있다. 그 자리에서 '테토남'과 '에겐남'에 대한 이야기가 잠시 오갔다.
요즘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일종의 성격 유형으로 '테토남', '에겐남'이라는 말이 쓰인다.
‘테토남’은 강인하고 거친 성격을 가진, 전형적인 남성성을 지닌 남자를 의미한다. 반면, ‘에겐남’은 섬세하고 감정적인 면이 두드러지는, 좀 더 여성적인 특성을 지닌 남자다.
연예인으로 비교하자면, 마동석이나 손석구는 테토남에, 정해인이나 박보검은 에겐남에 가까운 이미지다.
나는 개인적으로 테토남 같은 이미지를 동경한다.
영화 오펜하이머에 출연한 킬리언 머피가 주연을 맡은 드라마 피키 블라인더스 속 모습이 내가 추구하는 남성성과 닮아 있다. 드라마를 정주행 하진 않았지만, 정장을 입고 냉철한 표정으로 거리를 걷는 그의 짧은 영상 속 모습은 마치 내가 되고 싶은 사람처럼 느껴졌다. 섬세하기보단 거칠고, 사소한 것에 집착하기보단 큰 그림을 보는 사람. 어쩌면 단지 이미지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지향하는 자아상이었다.
하지만 인사동에서 내 맞은편에 앉아 있던 친구는 나를 완전한 에겐남이라고 말했다.
그녀 한 사람만의 생각일 수도 있었지만, 지금까지 나를 만나온 사람들 대부분이 나를 그렇게 보았다.
그 이유는 주로 순한 인상과 섬세한 행동 때문이라고 한다. 남성적인 거친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다는 것.
나는 누나가 한 명 있다. 어릴 적부터 누나와 가까웠고, 누나의 친구들과도 자주 어울렸다. 공기놀이, 학종이 뒤집기, 역할놀이 같은 활동들도 거부감 없이 함께했다.
물론 사춘기를 지나면서는 남자 친구들과 축구나 게임을 즐기기도 했다. 하지만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확실히 누나와 함께 보낸 시간이 많았던 것 같다.
그 시절이 지금의 내 섬세함과 감수성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준 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남성과 여성을 딱 잘라 구분하고 싶진 않지만, 테토남이 강한 남성성, 에겐남이 상대적으로 여성성을 의미한다는 데에는 어느 정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내 모습을 좋아해 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여자 형제가 있는 남자가 인기가 많대"라는 말을 참 많이 들었다. 여동생이나 누나가 있는 남성은 여성의 마음을 더 잘 이해하고, 공감과 배려가 가능하다는 기대가 담긴 말이었다. 실제로도 그런 부분이 있었던 것 같다.
누나에게 듣고 배운 것들이 여자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도움이 되었고, 큰 충돌 없이 어울릴 수 있었다.
하지만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면, 내가 꿈꾸는 자아상은 여전히 ‘테토남’이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강한 남성성을 길러야 할까? 섬세함을 버리고, 거친 면을 키워가면 되는 걸까?
그렇게 하면 진짜 내가 되는 걸까?
하지만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이미 지금의 나를 구성한 사회적 이미지가 너무나도 단단하게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테토남과 에겐남이라는 틀을 떠나, 나는 어릴 적부터 '모범생' 혹은 '착한 아이'라는 이미지를 지닌 채 자랐다.
누가 그렇게 되라고 한 적은 없지만, 자연스럽게 나에게 기대된 이미지였다.
그리고 그 기대는 곧 내가 스스로 지켜야 하는 틀이 되었다.
같은 반 친구들은 내 이름이 함께 불리면 안심했고, 나는 ‘교과우수상’보다 ‘닮고 싶은 친구상’을 더 많이 받았다.
생활기록부에는 언제나 ‘차분하고 성실하며’ 혹은 ‘바르고 착하다’는 말이 빠지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런 상을 동경하지도, 바란 적도 없었다.
나는 오히려 누군가가 편하게 장난 걸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친구들과 놀다 수업에 늦게 들어가는 것, 친구와 싸움도 마다하지 않는 모습, 보충학습을 빼먹고 어울려 노는 것.
작은 일탈에 대한 욕망은 늘 있었지만, 나는 그런 행동과는 거리가 멀었고, 그렇게 살 수 없었다.
그래서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이 쉽지 않다고 느낀다.
오랫동안 사회 속에서 쌓여온 이미지가, 내가 원하는 자아상과 완전히 어긋나 있을 때, 우리는 결국 어느 하나를 포기해야만 한다.
만약 당신이 추구하는 자아와 지금의 사회적 자아가 크게 충돌하지 않는다면, 어쩌면 당신은 더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느 쪽에 더 비중을 두며 살아야 할까?
살아가면서 몸담는 사회가 달라지니, 그에 따라 새로운 자아상을 시도해 봐도 되는 걸까?
아니면 지금이라도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변화해야 할까?
스스로를 모를 때 우리는 끊임없이 고민한다.
하지만 스스로를 너무 잘 알게 되었을 때도, 그 자아를 세상에 꺼내놓는 일은 여전히 어렵다.
그건 어쩌면, 또 다른 형태의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