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미한 휴가

by 최윤형

차라리 날 찾아주는 이가 있는 것이 좋았어


한 해 동안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연차는 모두 열세 개였다. 반차로 쪼개면 스물여섯 개. 아이들과 함께하는 공간의 특성상, 아이들이 학교를 마치고 오는 오후 시간대에 반차를 사용하면 실질적으로 스물여섯 번, 즉 이십육 일의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셈이다. 한 달을 평일 이십일로 계산한다면, 어쩌면 한 달을 통째로 쉬는 것도 가능한 숫자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연차 사용은 자유지만, 한 달 내내 쉬는 사람은 없다. 우리에겐 ‘사회적 눈치’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주로 한 달에 이틀, 금요일에 맞춰 연차를 사용해 왔다. 특별한 일정이 없어도, 방학처럼 바빠질 시기를 앞두고 체력을 비축하는 용도로 활용했다.


그런데 그런 연차가 꼭 유익하진 않았다. 아무 목적 없이, 그저 ‘안 쓰면 아까우니까’ 사용한 날엔 오히려 더 지루하고 공허했다. 적어도 일할 때는 무언가 살아있다는 감각이 있었지만, 쉴 땐 그조차 사라졌다.


최근 내가 일하는 센터에는 나와 비슷한 또래의 대학생들이 봉사나 근로장학생으로 들어오고 있다. 이들의 등장은 일손이 늘어난다는 실질적 도움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반가웠던 건 ‘또래의 존재’ 그 자체였다.


그동안 나는 부모님 세대와 함께 일해왔다. 존경할 만한 어른들과의 시간은 분명 배움이 많았지만, 어느 순간부터인가 나는 이 공간에서 이방인이 된 듯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나를 불편하게 했던 건 특정한 사람이 아니라, 또래 없이 존재하는 나 자신에 대한 부조화였다.


아버지도 그랬다. 서울 본사에서 오랜 동료들과 함께 지내시다가, 대구 지부로 발령이 난 후 사택에 머무시게 되었다. 나처럼 아버지도 “같이 이야기할 또래가 없다”며 쓸쓸함을 털어놓으셨다. 직급이 높다고 해서 외로움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함께 삶을 나눌 수 있는 존재, 그게 무엇보다 필요했던 것이다.


대학에 다닐 땐 이런 감정을 몰랐다. 모두가 또래였고, 갈등이 있어도 그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대학을 쉬고 사회에 나와보니, 그 당연했던 관계들이 얼마나 큰 지지였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이제 나는 나보다 20살 이상 많은 이들과, 혹은 초등학생들과 하루를 보낸다. 어느 사이, 나는 또래와의 시간에서 멀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다시 또래가 있는 공간에 놓였을 때, 그들의 존재만으로 나는 안도감을 느꼈다. 기대는 없었다. 그들과 친해지고 싶다는 마음도 아니었다. 단지, 그들이 있어준다는 사실만으로 내가 이곳에 있어도 괜찮은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최근엔 오히려 연차가 아깝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쓸모없는 하루가 된 연차보다, 바쁘게 불려 다니는 하루가 더 살아있게 느껴졌다. 지난 7월 11일 금요일, 연차를 쓰고 집에 머물던 날. 아무 할 일 없이 늦잠을 자고,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며, 오히려 ‘일하는 평일’을 그리워하게 되었다.


억지로 몸을 움직여 샤워를 하고, 독서모임에서 읽을 책을 들고 카페로 갔다. 음악을 들으며 책을 정리하다 보니 어느새 12시. 센터에 있었다면 점심시간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와 점심을 먹고 나니 오후 1시. 센터에서 가장 바쁜 시간이지만, 그날의 나는 가장 한가했다. 이어폰을 꽂고 오디오북을 들으며 시간만 흘려보냈다. 무료하고 답답한 오후. 나는 그 시간이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웃긴 일이다. 직장인처럼 살고 있는 내가, 월요일을 기다리다니. 보통의 우리는 월요일을 두려워하는데, 나는 오히려 그 분주함이 그리웠다. 당신은 어떤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주말과, 바쁘게 움직이는 평일 중 어느 쪽이 더 ‘살아있는 느낌’을 주는가?


물론,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성격, 환경, 심리 상태에 따라 다르겠지만, ‘살아있음을 느끼는 순간’이야말로 삶의 진짜 가치라고 생각한다.


아버지도, 나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우리는 누군가와 소통할 수 있을 때 더 존재감 있게 살아간다. 나는 또래와 일하며 나를 다시 이 공간에 ‘적합한 존재’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아버지도 대화할 상대가 있던 시절을 그리워하셨다.


그날의 연차에 누군가와 약속이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단순한 체력 비축이 아니라, 분명한 목적을 가진 시간이었더라면. 그렇게 소중한 연차를 무료하게 흘려보내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일본 만화 <원피스>엔 이런 말이 있다. “사람은 잊힐 때 비로소 죽는다.”

나 역시 대학 생활에서, 그리고 지금의 일터에서 또래와의 연결이 끊긴 채 살아오며, 어쩌면 나 자신이 잊히고 있다고 느껴왔다. 실제로 동기들이 나를 기억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스스로 잊혔다고 느끼는 순간, 그 감정은 이미 현실이 되었으니까.


그렇기에 우리는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 갈망한다. 내향적인 사람이라도, 안전이 어느 정도 확보된 사회 속에서 결국엔 ‘관계’와 ‘교류’라는 욕구를 품고 살아간다. 매슬로우가 말한 욕구의 단계처럼, 우리 삶 속에서 소통은 사치가 아닌, 필수적인 감각이다.


청춘도 마찬가지다. 눈부신 순간 속에서 우리는 더욱 빛나고자 한다. 그 빛을 찾아,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 발버둥 친다. 그래서 요즘은 마음 아픈 청춘들이 정신과를 많이 찾는다고 한다. 그들도 자신만의 빛, 살아있음을 갈망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각자의 세상이 더 아름다워질 때, 이 세상 또한 조금은 더 아름다워질 수 있지 않을까.

살아있음을 느끼는 하루가 더 많아질수록, 삶은 조금씩 더 가치 있는 것이 될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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