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초대받지 않은 곳에 함께하지 마라’는 문장을 자주 곱씹는다. 아무리 이상적으로 함께하고 싶은 무리가 있더라도, 그들이 나를 먼저 초대하지 않았다면 그 관계를 일정한 거리 안에서 조절하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조절’은 관계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선, 즉 서로 간에 설정된 틀을 넘지 않으며 형식적인 친밀함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말처럼 쉽지 않다. 쉽게 설명하면, ‘다가오는 것을 막지 않고, 떠나는 것을 붙잡지 않는다’는 말과 비슷하다. 일로 만난 사람과 사적인 관계로 더 가까워지고 싶더라도, 정서적인 초대 — 즉 심리적 거리의 좁혀짐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굳이 그 관계의 확장을 위해 애쓰지 않겠다는 뜻이다.
사실 20대 초반에는 지금과는 조금 다른 시선으로 사람들을 바라봤다. 타인을 존중하기보다는, 나 자신의 욕구를 채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겼고, 어쩌면 그런 생각조차 없이 본능적으로 행동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이상적인 관계 속에 있고 싶었고, 이상적인 사람과 함께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이상을 좇는 과정에서 상처를 받는 일이 잦았다. 이상은 말 그대로 이상일 뿐, 그에 다가서려 발끝을 세울 때마다 아픔이 따라왔다. 결국 그 노력이 큰 의미가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상처도 상처지만, 내가 나답지 못한 모습을 자주 보여야 했고, 그렇게 맺은 관계는 오래 가지도, 진심으로 반겨주지도 않았다. 애매한 관계는 억지로 지은 웃음으로 넘겼고, 어색한 미소와 따뜻하지 않은 인사는 결국 아무것도 감싸주지 못했다.
시간은 흘렀고, 나는 이십대 중반에 군에 입대해 3주간의 훈련소 생활 동안 사회와 완전히 단절되는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연배가 높은 선생님들과 함께 사회생활을 하며 또 다른 관계의 형태를 경험했다. 경조사와 방명록, 겉보기엔 단순한 절차 같지만 그 안엔 작지만 진심 어린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분들은 기쁜 일엔 함께 웃고, 슬픈 일엔 함께 울었다. 어쩌면 내가 그토록 바라던 관계보다 훨씬 더 따뜻한 연결이었다.
그렇게 나는 ‘초대받지 않은 자리에 굳이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는 걸 자연스럽게 체득했다. 혹시 이 생각이 지나치게 극단적인 걸까? 하지만 스쳐가는 사람들은 너무 많았고, 관계의 깊이도 매번 달랐다. 어떤 이는 첫눈에 인상이 깊었지만 말 한마디 섞을 기회조차 없었고, 어떤 이는 잠깐의 스침만 남기고 멀어졌다.
그 모든 관계에서 일일이 선을 넘으려 노력한다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짐을 짊어지고 살아야 할까. 그래서 이제는 조금씩 무뎌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람에게, 사랑에게, 관계와 소통에.
어쩌면 이 선택은 무딤이 아니라,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덜어내기 위한 하나의 결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