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러와 미움받을 용기
내가 나가지 않는 이유
우리의 감정은 결과를 위해 존재하는가, 아니면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가.
화를 내기 위해 소리를 치는 것과, 소리를 치기 위해 화를 내는 것은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실은 큰 차이를 가진다.
예를 들어, “나는 사랑받을 수 없다”며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사람은, 고립된 상황에서 만족을 느끼고 그 상태를 유지하려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는 ‘목적’을 위해 사는 사람일 것이다. 고립 속에서 느끼는 만족감, 다시 말해 타인의 측은지심이나 동정이 그의 감정을 충족시켜줄지도 모른다.
이 관점에서 보면, 심리적·정신적 어려움으로 집에서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의 ‘트라우마’는 거짓일 수 있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실제로 아들러가 말한 ‘목적론’과 이를 재해석한 『미움받을 용기』에서는 트라우마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즉, 트라우마는 특정 목적을 위해 ‘만들어낸 것’이라는 주장이다. 집 밖으로 나가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다. 트라우마는 목적이 아니라 결과에 가깝다.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트라우마라는 감정을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상황의 결과로 트라우마가 발생한다. 그리고 그 감정은 다시 그 상황이 재발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결합한다. 즉, 고립은 측은지심이나 동정을 얻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 다시 공포를 불러올 가능성을 피하기 위한 선택인 것이다.
부정적인 감정이 점점 줄어드는 상태에서, 그것이 다시 커져 자신을 잠식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 이것이 사람을 망설이게 한다. 전쟁을 겪은 상이군인이 비슷한 상황에서 극도의 공포를 느끼거나 발작을 일으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들은 목적론적으로 트라우마를 느끼는 것이 아니다. 전쟁이라는 경험의 ‘결과’로 공포심이 생겼고, 그로 인해 트라우마를 겪는다는 것은 명백하다.
이 점에서 ‘삶은 평이하다’는 주장에는 부분적으로 동의한다. 삶은 거대한 틀에서 일정한 흐름을 가지지만, 개별적인 사건이 만드는 굴곡은 사람마다 다르다. 그리고 결과론적 관점에서 본다면, 삶은 매 순간 새로운 곡선을 그린다.
그러므로 삶을 목적론적으로만 해석하며 “우리는 목적을 추구하는 존재이니, 잘못된 판단에서 벗어나 진정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식의 결론은 위험하다. 이는 각자가 겪어온 시간을 부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립을 자처하는 사람, 공포심에 사회로 나오지 못하는 사람 모두 그들 나름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들의 삶을 함부로 ‘목적을 위한 것’이라 폄하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