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과 균등과 외모와 사랑
차별이 사라진 자리에 돋아난 새싹은 아직 그 어미를 기억하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평등하다고 말한다. 적어도 제도적인 틀 속에서는 그렇다. 양반과 평민, 노비를 나누던 시대는 이미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고, 태어난 순간부터 누구든 법 앞에 동등하다고 말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분명 과거보다 더 나은 사회를 살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조금만 시선을 들여다보면, 평등이라는 말은 여전히 어딘가 불완전하게 다가온다.
사람들은 서로 다른 출발선에 서 있다. 어떤 이는 풍족한 가정에서 태어나 안정된 교육과 풍요로운 환경을 누리며 자라나고, 또 어떤 이는 시작부터 결핍 속에서 스스로를 단련해야 한다. 눈에 보이는 경제적 격차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도 차이는 드러난다. 예컨대, 누군가는 좋은 인상을 주는 외모와 사교적인 성격 덕분에 자연스레 더 많은 기회를 얻고, 또 다른 이는 조용한 기질 때문에 같은 자리에서조차 조금 뒤로 밀려나곤 한다. 사랑조차도 평등하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삶 속에서 자주 마주한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결과를 동일하게 만드는 것이 답일 수는 없다. 만약 누군가 열심히 노력해 얻은 결실을 사회가 강제로 균등하게 나눠버린다면, 자본주의 사회가 유지되는 가장 기본적인 동력—노력과 보상의 균형—은 금세 무너지고 말 것이다. 결과의 평등은 듣기에는 매혹적인 약속처럼 보일지 몰라도, 인간의 본능적 욕구인 성취의 기쁨과 의미를 빼앗아버린다.
그래서 우리는 기회의 평등을 말한다. 출발선은 다르더라도 누구나 스스로 길을 개척할 수 있는 가능성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육 제도를 개선하거나 복지 장치를 마련하는 것은 결국 이 기회의 평등을 조금이라도 가까이 실현하기 위한 시도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기회의 평등조차도 완벽하게 보장되기는 어렵다. 어떤 이는 선천적으로 타인의 마음을 쉽게 끌어당기는 매력을 지니고 태어나고, 어떤 이는 아무리 노력해도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에 도달하기 힘들다.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지니는 조건들은 결국 그 사람의 가능성의 폭을 결정짓고, 이는 다시 기회의 크기와 질을 바꾸어 놓는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곧 자각하게 된다. 평등은 완벽히 도달할 수 있는 상태라기보다, 끝없이 다가가려는 과정에 더 가깝다는 사실을. 중요한 것은 ‘차이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차이가 벽이 되지 않게 하는 것’일지 모른다. 재능의 차이, 외모의 차이, 가정 배경의 차이가 있더라도 그것이 곧 삶의 가능성을 닫아버리는 불공정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균형을 맞추는 일. 사회가 해야 할 최소한의 책임은 아마 그 지점일 것이다.
평등은 완전한 약속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관한 태도에 더 가깝다. 누군가의 조건을 이유로 배제하거나, 애초에 가능성을 지워버리는 사회는 결코 평등하다고 할 수 없다. 반대로, 각자의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그 차이가 누군가를 짓누르지 않도록 조율하는 사회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평등을 향해 나아가는 사회일 것이다. 우리는 아직 그 길 위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