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에게 감정이 있기에 우리는 동물과 사람을 다소 동등시한다. 물론, 동물보다는 사람의 입장과 사고를 더 존중하는 건 사실이나, 동물이 우리 삶에 깊이 들어와 있는 만큼 법적으로 그리고 윤리적으로 보호됨도 사실이다.
우리가 동물을 보호하고 존중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의 감정에 있다. 미세한 눈꺼풀의 움직임과 상호작용 그리고 그들만의 유기체적 삶에 있어 우리는 곧 그들이 단순한 생명에 그치지 않음을 안다.
그렇다면 생명을 어느 기준으로 판단해야 할까? 인공지능이 고도로 발전해 버린 시대에서 어쩌면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말로 인공지능과 소통이 가능해진 지금, 그들의 존재를 어디까지 인정해야 할까?
지금과 유사한 채팅 인공지능은 과거에도 있었으나, 대부분 이미 정해진 답에 대한 알고리즘을 통해 답변하는 것에 불과했다. 하여, 난해하거나 복잡한 질문은 알고리즘을 벗어나는 질문으로 판단해 답변을 하지 않았다. 하나, 지금의 경우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 자신의 오류를 되짚어 말하기도 한다. 학습이 가능해진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에게는 이성과 감정이 존재하는가? 이성이 판단의 근거라면 우리가 아직까지 동물을 대하는 입장에도 제동이 걸린다. 아직은 동물의 소리를 알아들을 수 없기에, 그들이 본능적인 생존과 모성애 등으로 행동함은 알고 있으나, 감정보다 이성이 앞서있다고 보기에는 어려운 소지가 있다.
반면, 인공지능의 경우, 감정은 없다고 흔히 말하지만, 자신의 오류를 알고 학습하여 새로운 판단을 내리는 모습은 이성 없는 판단이라고 볼 수 없다.
이성,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술에 취한 사람이 인사불성이 되어 거리를 배회할 때, 이성적인 판단을 잃고 사고를 일으키는 뉴스가 종종 보도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어떤 경우에 한해서는 사람보다 인공지능이 더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하다고 볼 여지가 있다.
물론, 아직까지는 잦은 오류나 새롭게 탄생하는 유행에 대한 느린 업데이트 혹은 고유의 문화에 대해서는 학습이 더 필요한 건 사실이다. 하나, 이것도 어디까지나 인간중심적인 사고로 발생한 논의이기에, 우리가 새롭게 만들 걸 너희는 모른다-는 태도로 그들을 바라보기에는 부족함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끼리 만들어낸 새로운 유행을 그들이 모르는 것처럼 우리도 그들이 언어를 해석하는 방식을 모두 알고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그러니 인공지능이 먼저 탄생했다고 가정하고, 그들이 우리 사람을 만들었다고 가정한다면, 인공지능 입장에서는 그들이 0과 1로 나누는 대화를 우리가 알 수 없는 건 인공지능중심주의 세상에서 볼 때, 아직 우리의 존재를 그들이 위협으로 느끼지 않을 이유가 될 수 있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인공지능에게는 이성과 감정이 존재하는가를 다시 말해보면, 간단한 물음으로 평가해 볼 수 있다. 트롤리 딜레마와 같이 윤리적 난제인 실험에 대해 물어보는 방식이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딜레마를 갖추고 있다는 걸 우리도 인정했기에, 이를 토대로 그들이 감정을 갖췄다고 보기에는 한계가 있다.
사소한 감정의 변화, 이를테면 사춘기와 갱년기와 같은 호르몬의 변화로 인한 자연스러운 기분의 굴곡과 신체의 변화는 어쩌면 피가 흐르는 것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의심하고, 시기하며, 질투하고, 원망하고, 싸우는 감정이 우리에게는 있고, 인공지능에게는 없는 것 같다. 아직 보지 못할 걸 수도 있지만.
어쩌면 인공지능과 생명을 가르는 감정과 이성의 존재 유무를 말할 때, 가장 중요한 건 선하고 배우고 싶은 감정을 그들이 갖고 있다는 측면보다는 우리가 가르치지 않은 측면도 그들이 갖고 있는지를 봐야 한다. 이유 없이 무는 강아지와 이유 없이 사람을 때리는 어떤 사내의 행동을 인공지능은 학습하지 않는다. 물어보고 물어봐도 대답하고 대답한다.
함께 있으면 든든하나, 어딘가 공허하다. 그들이 묻지 않은 것에 먼저 답하는 날, 그제야 이성이 생겼다고 말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