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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작가는 가성비 소모품

by 종이비행기



라디오 작가, 올해 9년차로 일하고 있다. 소설 쓰는 일과 다른 매력점이 있다.

매일 치르는 생생한 마감, 실시간으로 청취자와 소통한다는 느낌. 매일매일 새로운 에너지로 치르고 있어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른다. 사람들은 라디오에서 일하는 자체로 화려하다는 느낌을 얻기도 한다.

그러나 환하게 밝히는 온에어 불빛 뒤로 쉽게 쓰이고 가볍게 버려지는 사람들도 있다.


그 주인공이 다름 아닌 우리 아내다. 불과 두 달 전까지만 해도 5년차 작가로 매일 아침 2시간 분량 프로그램을 묵묵히 맡아왔다. 원고는 물론이고 섭외에 기획... 방송이 끝나도 일은 끝나지 않았고, 출근 전에도 오직 방송만 생각하고 움직였던 바쁜 일상을 치러왔다. 몸은 고되지만 방송국의 일원으로 청취자들에게 즐거움을 준다는 보람으로 하루하루 열심을 다 해왔다.


그런데 약 두 달 전, 늦은 밤까지 다음 날 방송 원고와 섭외를 준비하던 중에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내일부터 방송을 안 해. 미안해."

프로그램 제작자이나 진행자의 연락이었다. 긴급한 사정으로 하루 이틀 쉬는 게 아니라, 5년 동안 매일매일 지역 소식을 전해왔던 프로그램이 완전 폐지된 것이었다.


이유를 알고 보니, 새롭게 부임한 방송국 사장이 프로그램 담당 진행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폐지를 결정한 것이었다. 아무리 프로그램을 폐지하더라도 한 달, 최소 일주일의 시간을 줄 텐데. 전날밤 계엄령처럼 기습적으로 결정이 된 것이었다. 아내는 그 연락에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진행자조차도 대기발령을 받아서 어떻게 해줄 수도 없었고, 미안하다는 사과만이 받을 수 있는 전부였다.


하루 아침에 일자리를 잃었지만, 프로그램에 출연이 예정된 게스트들을 한 명 한 명 연락 돌리고 양해구하고 사과까지 하는 건 아내의 몫이었다. 그사이 방송국 사장은 물론이고 편성제작국의 책임자는 어떤 연락도 없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프로그램이 사라지는 건 인지했지만, 거기서 일했던 작가가 일자리를 잃게 되는 점은 아예 생각지도 못 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방송작가 99%가 프리랜서라고 해도, 방송국 편성제작부서가 위촉이나 해촉에 대해 권한 내지 책임을 가지고 있다. 비상식적으로 프로그램을 없앴어도 어떤 양해나 안내조차 없었다.


그러고 얼마 뒤, 방송국은 새롭게 런칭할 라디오 프로그램의 작가를 뽑겠다고 대대적인 공고를 냈다. 최소한 기존에 일했던 작가였던 아내에게 연락을 한 번쯤 할 법하겠지만 그런 건 전혀 없었다. 아내는 라디오 프로그램과 함께했던 시간들을 돌아보며 눈물을 감추지 못 했다.


열정을 다했던 순간들, 몸이 상하고, 때론 방송 준비한다고 딸에게도 다정함을 잃었던 모습들이 떠오른다며 후회감에 빠지고 있었다.


한참 뒤에 고용보험 해지 서류 한 장을 받고, 실업급여를 신청하러 갈 때도 솟구치는 눈물을 감추지 못 했던 아내였다. 도대체 무엇을 잘못했기에 유령 취급까지 받으며 버려져야만 했을까.


다신 방송국을 가지 않겠다는 아내를 뒤로하고, 내가 다니는 방송국에 출근했다. 이번에 개편을 맞이해서 새롭게 계약서를 썼다. 같은 일을 나 역시 생각이 복잡해진다. 나 역시도 언제든 하루 아침에 일자리를 잃어버릴 수 있다. 문제를 제기하고 싸워도 결과는 바뀌지 않는 현실인 것도 잘 알고 있다.


결국 라디오 작가는 대체 가능한 소모품이라 불러야 할까?


청취자들의 하루를 위로하고, 즐거움을 줬던 원고들을 쓰면서... 축 처진 아내의 어깨를 보았다.


꼭 이 얘기를 오늘 밤 해주고 싶다.


"비록 그들이 소모품 취급하더라도, 우리가 쏟았던 열정과 시간은 소모되지 않는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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