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왕시 백운호수 밑에 있는 조용한 동네에서 9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모님께서는 일제 강점기 함흥시에 거주하시다가 토지주를 따라 이주하셨다. 아버지께서는 저수지 축조에 참여하셨다. 일당으로 쌀 한 되를 받으셨다. 초등학교 입학 전 해에 아버지 고향인 화성시 비봉면으로 이사했다. 이듬해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5학년 1학기까지 다니고, 2학기에 큰 형님이 살고 있던 서울로 전학, 고등학교까지 졸업하였다.
청소년기는 많은 고민과 방황 속에 떠나보낸 시기였다. 서울 생활은 외롭고 힘든 시간의 연속이었다. 삶에 대해 논의하고 협조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이 주위에 전혀 없었다. 20년 나이 차이 나는 형은 도움 주지 못했다. 모든 일을 혼자 고민하고 해결해야만 했다. 요즘처럼 진학이나 직업에 대한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는 시대는 아니었다.
경제발전이 비약적으로 이뤄지는 시기로 기계․전자․전기․화공과 등은 졸업 후 취업이 거의 보장되었다. 고교 시절 12반 중에서 8반이 이과였을 정도로 공대는 인기가 높았다. 나 역시 별다른 고민 없이 고교 2학년 때 이과를 택했다. 고교 3년 때 형님의 사업 실패 등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진학에 실패하였고 재수생이 되었다. 그 시절이 그나마 별생각 없이 공부에 전념한 시간이었다.
학력고사 성적을 받아 든 후 학교, 학과 선택시점에 아주대학교 환경공학과가 눈에 들어왔다. 내 점수보다 훨씬 하향 지원임에도 색다른 전공이 마음을 들었다. 숨 막히는 서울을 떠나 보고 싶은 마음도 한몫했던 것 같다. 막상 입학하고 나니 신설 학과라 교육과정이나 교수진에서 부족한 점이 많았다. 또다시 이런, 저런 이유로 방황하며 세월을 보냈다. 학과 공부보다도 학교 도서관에 틀어박혀서 책만 읽은 시간이 많았다. 물론 학점이 좋을 리 없었다. 2년 뒤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학창 생활을 잠시 접고 군에 입대하였다. 군 생활은 내 인생의 방향을 찾기 위한 멈춤의 시간이었던 것 같다.
3년 만에 복학하여 정신 차리고 공부하려 하였으나, 1987년 민주항쟁 분위기 속에서 시험 거부 등 정상적인 학교생활이 어려웠다. 환경공학 전공으로는 대기업은 갈 수 없었고 대부분이 중소기업으로 취업했다. 당시 공무원은 보수는 적지만 안정적인 조건으로 점차 인식이 좋아지고 있던 시기였다. 성적과 무관하게 시험으로만 뽑기 때문에 나에게는 좋은 탈출구였다. 행정직 7급을 염두에 두고 4학년 때부터 영어 공부하고, 행정학, 경제학 등 수강하며 준비했다. 경제적으로 어려워 등록금은 대출받고, 3학년 때는 사촌 누나 집에서 조카 공부를 지도하며 숙식을 해결했다, 4학년 때는 넉넉하지 않은 둘째 누나 집에서 얹혀 지냈다. 이때 과외(당시는 몰래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는데 입소문이 나면서 학생 수가 많아져 졸업한 이듬해에 융자금을 모두 상환할 수 있었다.
행정직, 공공기관 등 학점과 상관없이 시험으로 뽑는 곳을 염두에 두고 취업 준비 중에 1989년 6월 경기도에서 환경직 9급을 처음으로 뽑는 공고문이 떴다. 별다른 생각 없이 응시하였는데 합격하였고, 9월 11일 성남시 수정구청 환경위생과로 발령받았다. 이런 과정을 거쳐 공직이라는 옷을 입게 되었다. 다니면서 다시 7급 준비하려고 했는데, 신설된 직렬이라 승진이 빨랐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었다.
수없이 돌고 돌아 끝내는 환경을 관리하는 평생의 길에 들어섰다. 인생이란 익숙한 길모퉁이를 돌다 불현듯 안개 속 미지의 골목으로 접어들 듯이 삶은 그렇게 결정되는 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