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예언이 된 '순수한 보수'의 탄생

장정일 《구월의 이틀》(2009)

by rew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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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장정일은 소설 《구월의 이틀》에서 보수청년 탄생기를 그렸다. 그에 따르면 1980~90년대는 한국 문학에서 ‘좌익청년 일대기’가 쏟아지던 시대였다. 그런데 ‘우익청년 일대기’는 없다. 이는 한국의 우익이 낡고 병들었기 때문이다. 좌익이 주구장창 전인격적 인간 군상을 그려내는 동안 우익은 이를 멀찍이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건전한 상식과 철학을 갖춘 나라에 우익청년 일대기가 많이 존재하는 것이 한국 우익의 불임성을 증명한다.


장정일이 그려내고자 하는 새로운 보수의 핵심은 순수성이다. 구 우익(Old Right)에겐 친일이라는 원죄가 있고, 뉴 라이트(New Right)에겐 좌파에 대한 피해의식이 있지만 퓨어 라이트(Pure Right)는 그 어떤 것에도 빚지지 않았고, 그 어떤 것에도 영향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퓨어 라이트에겐 타자가 없다. 퓨어 라이트에게는 스스로의 거듭남만이 중요하다. 그때만 해도 다소 어색하게 보이던 ‘우익 시민단체’가 여기저기서 생겨나던 시절, 장정일은 이제 우리도 건강한 우익청년의 서사를 갖출 때가 됐다고 판단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장정일은 틀렸다. 그가 기대했던 새로운 시대의 보수는 외국인,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 혐오로 눈을 돌렸다. 그들은 오롯이 거듭나기는커녕 페미니즘과 다문화주의의 적대적 타자가 되어 버렸다. 자신의 가능성을 스스로 제한하고 유폐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정일의 작업이 흥미로운 건, 그가 그려내고자 했던 보수와 현재의 보수를 대조해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장정일이 구시대의 부채로부터 자유로울 것으로 전망한 그들이 왜 여전히 피해의식으로 허우적거리는지를 고민하는 일은 언젠가는 탄생할 보수청년 일대기의 밑그림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나름의 의의가 있을 것이다.


《구월의 이틀》의 주인공은 금과 은이라는 이름의 두 청년이다. 금은 광주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는 지역의 풀뿌리 운동가다. 금의 아버지가 노무현 대통령 당선 이후 청와대 보좌관으로 들어갈 때쯤 금도 서울의 명문대에 진학하여 금의 가족은 서울로 이사한다. 은은 부산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는 실패한 사업가다. 은 역시 금이 다니는 명문대에 진학하는데, 때마침 은의 큰아버지가 해외 이주를 하면서 서울 큰아버지 집에 머무른다.


금과 은은 나름의 방식으로 성장한다. 이들이 처음 마주하는 성장은 ‘남자 되기’다. 잘생긴 얼굴에 다부진 몸을 가진 금은 영어 회화 학원에서 20살 연상의 반고경을 만나 매일 섹스를 한다. 그런데 섹스는 언제나 반고경이 주도한다. 때문에 금에게 남자 되기란 반고경에게 영향력 확대하고 관계의 기울기를 바꾸는 일이다(금은 이후 반고경과의 여행에서 그녀의 입을 자신의 사타구니에 쑤셔 박음으로써 이 작업을 완성한다). 즉 금은 관계의 주도권을 확대해 나가는 것으로 ‘남자 되기’의 내용을 습득한다. 금이 심지어 어머니의 어린애 취급마저 역겨워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금과 달리 작고 희며 곱상한 외모를 지닌 은에게 남자 되기는 신체적 열등감 극복의 문제다. 은은 지나치게 여리다. 바닷가에서 어린아이가 쌓는 모래탑을 바다가 허물어뜨리는 것에서 사정 후 곧 수그러들 소년의 성기를 연상하는 은에게 연약함은 성장하기 위해 반드시 극복해야 할 약점이다. 하지만 금과 달리 은은 도저히 성장의 계기를 마련할 수 없다. 유약한 외모에 심지어 동성애자인 은에게 성장은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친구(혹은 연인)가 된 금과 은의 관계에서 주도권은 당연히 금에게 있다. 금이 가진 것(여자, 근육질의 몸, 관계에 대한 영향력)이 은에게는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기묘한 역전이 시작된다. 아버지의 자살을 계기로, 금이 자신이 가진 것에 회의하기 때문이다.


반면, 은은 보수 대학생 단체를 만나 완전히 새로이 거듭남으로써 금에 대한 우위를 확보한다. 은이 학습한 보수의 핵심적 가치는 아름다움이다. 아름다움은 강함의 동의어다. “강한 것은 선하고, 강한 것은 아름답다”(243).* 은은 보수주의의 거두 거북선생으로부터 보수가 진보와 논리로 싸움하지 않는다는 것을 배운다. 거북선생이 말하듯 세상의 모든 지식은 좌파 소유이기에 보수는 이전부터 그래 왔듯이 힘에 호소해야 한다. ‘빨갱이’, ‘좌파’라는 기호를 지속적으로 유통시킴으로써 만들어지는 힘. 왜소한 몸과 흰 피부의 은은 힘을 강조하는 보수주의에 매료된다. ‘평등’ 운운하는 좌파는 강함을 배제한다는 점에서 약해빠진 입장일 뿐이다. 강한 것이 곧 아름다운 것이라는 보수주의의 원칙을 체득한 은은 이제 더 이상 자신을 여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도덕과 엘리트주의를 강조했던 미국의 저명한 보수주의자 앨런 블룸


둘 사이의 관계 역전을 가장 도드라지게 보여주는 건 둘 사이의 퀴어적 관계다. 과거의 은은 금과 함께 보디빌딩 동아리에 들고 싶어 했다. 보디빌딩 동아리에 가입하면 금의 몸을 볼 수 있을 거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은의 욕망은 실현되지 않았다. 은은 여자와 섹스할 때 발기되지 않는 자신의 성기에 괴로워하기도 했다. 그런 은을 처음 사정하게 한 여자는 금의 애인이었던 반고경이다. 은은 반고경에게 벨트를 휘두르며 이를 금과의 섹스로 치환한다. 은은 그제야 사정을 할 수 있었다. 즉, 은은 자신의 모든 결핍을 금을 동경하고 욕망함으로써 해소해 왔다.


그러나 상황이 바뀌었다. 오히려 안달 난 쪽은 금이다. 이제 은은 더 이상 ‘강하고 아름다운 것’을 금에게서 찾지 않는다. 보수주의의 정수를 체득한 은에게 금은 가소로운 존재가 되어버렸다. 은과의 관계에서 금의 남성성은 수축을 거듭한다. 금이 할 수 있는 건 찌질한 복수밖에 없다. 그는 자신을 버리고 거북선생에게 간 은의 항문에 침을 묻히지 않고 삽입함으로써(즉 통증을 안겨줌으로써) 은을 응징한다. 은은 그런 금을 가련히 여긴다. 은의 승리와 금의 패배는 남성성과 퀴어 관계를 경유하며 차근히 전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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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BI의 창설자이자 동성애자였던 J. 에드가 후버(왼)와 영화 〈제이. 에드가〉에서 그를 연기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여성적인 남성 동성애자인 은이 새로운 보수의 후계자로 지목되는 건 풍자인 동시에 현실이다.** 은은 자신의 결핍을 강함에 대한 동경으로 채웠다(동성애자라는 설정은 이 결핍을 극화하기 위한 수단이다).


하지만 장정일의 예상과 달리, 새로운 세대의 보수들은 은이 되지 못했다. 이들은 강함에 대한 순수한 동경이 아닌 페미니즘과 다문화주의에 대한 혐오로 자신을 채웠고, 이로 인해 획득된 알량한 권력을 약자에게 휘두르며 자신의 강함을 확인하려 들었다. 차별의 구조를 은폐하는 능력주의를 주창하는 자가 그들을 대변한다며 보수당 대표로 나서자 열광했고, 자신(‘이대남’)의 목소리가 보수정치에서 확대 재생산되는 현상에 흥분했다.


그러나 동시에 이는, 장정일이 완전히 틀리진 않았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가 잘못 예측한 건 새로운 보수가 ‘순수한 관념’으로 자신의 강함을 증명하려 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가 제대로 예측한 건 보수가 ‘강함’에 대한 집착으로 자신을 증명해 내려한다는 점이다. 평등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유약함의 표지로 여겨지고, 자신의 ‘능력’으로 생존해 내는 자에 대한 예찬이 공정하다고 여겨지는 시대에 장정일의 예언은 다소 비극적인 방식으로 성취된 것이다. 강함에 대한 엇나간 관념이 공정과 역차별의 이름으로 판치는 사회에 퓨어 라이트는 없다. 건강한 보수의 탄생은 다음 세대의 일로 미뤄졌다. 우리는 여전히 우익청년 탄생기를 가지지 못했다.



*실제로 미국의 저명한 보수주의자였던 앨런 블룸은 엘리트주의가 우익의 유일무이한 이데올로기임을 천명하였다 한다.


**장정일은 입만 열면 도덕과 엘리트주의를 논한 앨런 블룸이 에이즈로 죽었다는 점에서 그의 위선을 비판한다. 사상과 일상의 층위를 일치시키지 못한 또 다른 보수적 인물로 FBI를 창설하고 종신국장으로 재임한 J. 에드가 후버를 들 수 있다. 제이 에드가의 삶은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연출하고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주연을 맡은 영화 〈제이. 에드가〉(2011)에 잘 나타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