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준 《까마귀》(문학과지성사, 2005)
이태준의 단편집 《까마귀》는 작가가 생명을 화두로 많은 고민을 해왔음을 보여준다. 개별적인 주제와 완성도를 갖춘 각각의 작품은 생명을 키워드로 했을 때 일관되게 묶인다. 이태준에게 생명은 허무하면서도 강렬한 것이다. 그래서 구질구질한 비극에 휩쓸리는 생명에 애잔함을 느낀다.
궁핍한 현실 속에서도 거대 사회 담론을 얘기하기를 즐기는 불우 선생(〈불우 선생〉), 푼수데기 신문 배달부 황수건(〈달밤〉)은 묘한 매력을 지닌 인물이다. 그들은 쓸 데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는 하찮은 인물이다. 하지만 이들은 소설 속 서술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스스로를 하찮게 만드는 성격을 버리지 않고 고집스레 버텨나가는 그들은 경이로운 생명이 놓인 실존의 비극적 조건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공허한 인간관계에 헛헛함을 느끼는 소설가가 주인공인 〈장마〉는 왜 위태로운 실존의 조건을 공유하는 인간이 서로 연결되지 못하는지를 음울한 정서로 질문한다. 같은 처지를 공유하는 사람들이 관계를 맺는다면, 〈불우 선생〉‧〈달밤〉의 주인공처럼 우스운 꼴이 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들은 서로의 손을 잡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은 우스워지는 데서 멈추지 않고 비참해지기까지 한다. 〈복덕방〉의 주인공 안초시는 부동산 투자로 한몫 단단히 잡아 떨어진 위신을 되찾고자 한다. 하지만 대박을 낸다던 땅값은 오를 기미가 없고, 결국 그 소문이 사기였음이 드러난다. 안초시는 절망하여 자살한다. 안초시의 비극은 죽음 후에도 이어진다. 딸은 부끄럽다는 이유로 아버지의 자살을 감추려 하고, 안초시의 친구는 이를 비밀로 하는 대가로 안초시의 보험금을 뜯어낸다. 돈에 한이 맺힌 안초시는 죽어서까지 돈으로 모욕당한다.
〈밤길〉의 주인공도 만만치 않다. 〈복덕방〉에서는 자식이 부모를 버렸다면, 〈밤길〉에서는 부모가 자식을 버린다. 아내가 두 아이를 남겨둔 채 도망가자 남자는 패닉에 빠진다. 지금 형편으로는 젖도 못 뗀 갓난아이를 도저히 키울 수가 없다. 그래서 아기를 땅에 묻기로 한다. 하지만 금방 죽을 것만 같던 아기가 좀처럼 죽지 않는다. 꺼져가는 생명의 마지막 강렬함은 못난 아비의 등골뿐만 아니라 독자의 간담까지 서늘하게 한다.
비참하게 죽음으로 내몰린 생명이 뿜는 강렬함은 〈까마귀〉, 〈농군〉에도 잘 드러난다. 폐병을 앓아 창백한 여인과 화살에 맞고도 끈질기게 도망가는 까마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희고 검은 색상의 대비만큼이나 생명 의지의 대비도 강렬하다. 만주로 이주한 〈농군〉이 보여주는 생명력도 인상적이다. 토착민들의 갖은 핍박 속에서도 끝내 수로를 개간하는 농군의 의지에는 생명이 그리 간단히 소멸하는 것이 아님을 역설하는 선명한 메시지가 담겨 있는 듯하다.
이태준은 생명의 문제를 강조하기 위해 젠더를 활용하기도 한다. 물론 문제적인 방식으로다. 다른 근대 남성 작가들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이태준 역시 자신이 포착한 비극을 극대화하기 위해 여자들을 풍경으로 박제한다.
〈패강랭〉의 현은 고향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그리워하며 오랜만에 평양에 돌아왔다. 하지만 정작 그가 느끼는 건 평양이 폐허가 되었다는 서글픔이다.
현은 평양 여자들의 머릿수건이 보기 좋았었다. 단순하면서도 흰 호접과 같아 살아 보였고, 장마처럼 자연스런 무게로 한 송이 얹힌 댕기는, 그들의 악센트 명량한 사투리와 함께 ‘피양내인’들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아름다움이었다. 그런 아름다움을 그 고장에 와서도 구경하지 못하는 것은, 평양은 또 한 가지 의미에서 폐허라는 서글픔을 주는 것이었다.
현이 서글픔을 느끼는 건 여자들이 더 이상 머릿수건을 하지 않아서다. 현에게 여자들의 머릿수건은 '평양다움'의 표지다. 현이 고향의 정취로 위로를 받으려면, 즉 현이 생기를 얻으려면 여자가 '고향'이 표상하는 과거에 고정된 채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 고향을 떠나 앞으로 나아가는 남자와 과거에 박제된 여자의 대비를 통해 남자가 마주한 생명의 고뇌를 형상화한 것이다.
〈토끼 이야기〉에서도 마찬가지다. 소설로 밥벌이를 하다가 신문과 잡지가 폐간되어 글을 연재하지 못하게 된 현과 아내는 토끼 사육으로 생활을 꾸려나가기로 한다. 그런데 점차 궁핍해져 토끼 먹이 구하는 일조차 어려워진다. 토끼 값도 자꾸 떨어지기만 한다. 유일하게 남은 방법은 토끼를 잡아 고기로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문학가인 현은 도저히 토끼를 죽일 수가 없다. 그렇게 현은 현실을 외면한다. 결국 칼을 들어 토끼를 죽이는 건 그의 아내다. 현은 멋쩍은 표정으로 토끼를 잡는 아내를 보며 놀라 그를 나무란다. 그리고 자신의 무능으로 꿈 많던 아내가 험한 일을 하게 되었음을 자책한다. 〈토끼 이야기〉는 〈패강랭〉과 마찬가지로 생명을 위로하고 지속하는 데 필요한 궂은일을 여자가 떠맡게 됨을 강렬한 시각적 이미지로 형상화했다. 생명의 강렬함을 도드라지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불평등한 젠더 권력을 비판 없이 차용한 것이다.
해방 후 극한의 혼란을 다루는 작품 〈해방 전후〉는 다른 작품과는 다소 결이 달리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역시 큰 틀에서 보면 나아갈 길을 잃은 생명의 고뇌를 형상화한 작품이라는 독해가 가능하다.
결국 이태준은 시종일관 생명의 조건, 현실, 방향을 모색해왔다. 하지만 명쾌한 답을 찾지 못했다. 이는 세계에 대한 리얼리즘적 분석의 부재, 즉 이태준이 순수문학을 추구했다는 데서 그 이유를 찾을 수도 있다. 혹은 비극적 생명이 인간의 운명 그 자체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든 이태준은 강렬함을 품은 생명을 위로할 만족할 만한 방법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답을 갈구하는 이태준의 집요한 예술적 노력은 그의 음울한 문학적 주제와 달리 독특한 아름다움을 뿜는다. 이태준의 문학적 성취‧의의는 비극의 원인을 규명하려는 인간의 슬픈 의지에 녹아 있는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