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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wr Oct 18. 2021

퀴어 로맨스의 과잉 낭만화가 불편하다

드라마 〈마인〉 리뷰


  다시 한번, 부잣집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백미경 작가는 전작 〈품위 있는 그녀〉에서 계급상승이 불가능해진 우리 사회의 현실을 파국적 결말로 형상화했다. 다만, 같은 설정을 공유하는 드라마 〈마인〉에서는 계급상승이 아닌 여성들의 연대가 화두다.


  대기업 효원의 회장 자리를 노리는 효원가(家) 첫째 며느리이자 레즈비언인 정서현, 빼앗긴 친아들을 되찾기 위해 효원에 들어온 강자경, 남편에게 철저히 속았음을 깨닫고 독립적인 미래를 준비하는 효원의 둘째 며느리 서희수. 세 여자는 ‘내 것(mine)’에 집착하여 대립하다가, 서희수의 유산(遺産)을 계기로 서로의 아픔을 이해하며, 대상을 향한 집착이 아닌 여자들의 연대로 ‘내 것’의 의미를 확장해 나간다. 〈마인〉이 〈품위 있는 그녀〉의 기본 설정을 반복했음에도 진부함을 주지 않았음이 이 드라마의 완성도를 증명한다.


  〈마인〉은 레즈비언 서사를 다룬다는 이유로 여러 화제*를 낳기도 했다. 여러 독해가 가능하겠지만, 나는 〈마인〉이 재현하는 레즈비언을 보며 두 가지 질문이 생겼다.



1. 정서현의 비밀과 한지용의 비밀은 등가인가?


  극의 초중반부에 정서현과 그의 시동생인 한지용이 대립하는 장면이 나온다. 둘은 누가 효원의 회장직에 오를 것인지를 두고 경쟁하는 관계다. 한지용은 어긋난 부성애로 아들 하준을 낳아 준 생모 강자경을 튜터로 들여 현 부인인 서희수와 한집에 살게 했다. 낳아 준 엄마, 키워 준 엄마와 함께 살면 아들이 ‘결핍’ 없이 자랄 수 있을 거라는 기대에서였다. 문제는 서희수가 강자경이 하준의 생모라는 걸 모른다는 데 있다.


 한지용과 정서현


  이 사실을 알게 된 정서현이 한지용을 비난하고 추궁한다. 그런데 한지용은 태연하다. 그가 형수의 ‘죄’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뒷조사를 통해 정서현이 레즈비언임을 알아낸 한지용은 정서현이 자신의 비밀을 폭로하면, 자기도 정서현의 비밀을 폭로하겠다고 응수한다. 정서현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두 문제가 같냐고 반문하자 한지용은 “죄의 무게감은 다를 게 없다”고 답한다.


  아이를 위해서라면 두 여자의 삶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한지용의 비윤리적인 태도는 동성애 성적 지향과 등가로, 즉 '교환 가능한 것'으로 취급된다. 한지용에게 동성애 섹슈얼리티는 자신의 온갖 이기적 패륜과 ‘같은’ 무게감을 지닌 ‘죄’일 뿐이다. 나는 이 장면 이후 모든 것을 자기 손에서 통제하려 들어 그리 좋게 보이지 않았던 정서현을 옹호하기로 했다. 패륜적 이기심과 동성애를 ‘등가의 죄’로 취급하는 한지용(우리 사회)의 윤리관은 수정되어야만 한다. 이는 다소 낯간지럽게 재현된 정서현과 그의 연인 최수지의 로맨스 장면이 어느 정도 용인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쨌든 누군가는 ‘계몽’되어야 할 테니까.



2. 왜 퀴어 로맨스는 과잉 낭만화될까?


  그러나 퀴어 로맨스가 고상하고 아름답게만 재현되는 방식을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이는 〈마인〉의 문제만이 아니다. 최근 국내외 많은 드라마와 영화가 퀴어 로맨스를 다룬다. 문제는 퀴어 로맨스가 거의 언제나 과잉 낭만화된다는 점이다. 극의 이성애자들은 사랑에서 어려움을 겪지만, 퀴어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에게 없는 건 사회적 인정뿐이다.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 속 퀴어들은 사회적 인정만 있으면 사랑에 아무런 문제를 겪지 않는 존재들처럼 묘사된다.


  이는 퀴어 로맨스가 실천되는 구체적인 맥락을 비가시화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낭만적 관계를 향유하는 퀴어 커플도 있지만, 배타적·독점적 관계를 지향하는 이성애규범적 친밀성을 위반해 온 퀴어 친밀성의 계보도 있다. 하지만 드라마·영화의 초점은 늘 전자에만 맞춰진다. 비규범적 퀴어 친밀성은 이성애규범적 사회에 의해 한 번, 퀴어 로맨스의 과잉 낭만화에 의해 또 한 번 이중으로 비가시화된다. 퀴어 로맨스 상찬이 또 다른 퀴어 친밀성을 삭제하는 아이러니로 이어지는 것이다.


〈마인〉의 최수지와 정서현


  그렇다면 드라마·영화 속 퀴어 로맨스는 왜 과잉 낭만화될까? 이성애가 더 이상 낭만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점차 많은 여성이 기존 이성애 관계가 불평등한 젠더 권력에 기대어 작동함을 알아차리고 있다. 뉴스에서는 매일 젠더 폭력 사건이 보도된다. 즉 낭만적인 이성애 커플이라는 이미지는 이제 설득력을 '잃었다'. 하지만 낭만적 사랑의 매혹을 버릴 순 없다. 사랑을 통한 구원/자기 완성이라는 테마는 불안이 판치는 시대에 더욱 '갈망할 만한 것'으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퀴어 로맨스가 주류 미디어의 눈에 들어오는 건 이때다. 불가능해진 이성애 로맨스의 상상적 대체물로써 퀴어 로맨스가 과잉 낭만화되는 것이다.


  이는 이성애규범을 허무는 급진적 퀴어 친밀성을 비가시화한다는 점과 더불어 이성애 커플이 마주한 문제를 진지하게 대면하지 않고 회피한다는 점에서도 문제다. 이성애 사랑이 불가능해졌다면, 퀴어 로맨스를 대용품 삼을 것이 아니라 왜 특권적 지위를 누리는 이성애 사랑‘조차’ 불가능해졌는지를 질문해야 한다. 즉, 불평등한 젠더 권력을 질문해야 한다. 퀴어 로맨스를 어설프게 재현하는 것으로 이성애가 당면한 문제로부터 도피해서는 안 된다. 이성애가 당면한 문제는 더 진지하게 탐구될 필요가 있고, 퀴어 로맨스는 틀에 박히지 않은 다양한 방식으로 재현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물론 〈마인〉은 꽤 괜찮은 드라마다. 남자들의 질서가 지배하는 공간에서 여성들이 연대하고, 그 연대의 핵심 계기 중 하나가 동성 연인과의 사랑에서 얻은 깨달음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마인〉 역시 틀에 박힌 퀴어 로맨스 재현을 벗어나지 못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더 많은 퀴어의 등장이 아닌 퀴어의 윤리적 재현이다. 퀴어 로맨스를 허물어져 가는 이성애규범의 도피처로만 활용해서는 곤란하다.



*일례로, 정서현의 레즈비언 연인 최수지를 연기한 김정화 배우의 남편 유은성 씨는 개인 SNS에 '기독교인으로서 〈마인〉과 동성애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결국 정상(이성애)으로 돌아간다', '동성애 소재는 노이즈 마케팅이다' 등을  운운하여 큰 비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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