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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wr Nov 12. 2021

게이라는 열등감

영화 〈쌍화점〉 리뷰


  1995년 세계사에서 초판이 나오고, 문학과지성사에서 2012년에 복간된 유하의 시집 《무림일기》를 읽었다. 삶의 태도를 다룬 진지한 시와 키치를 활용한 풍자시가 함께 실린 독특한 시집이었다. 영화 〈쌍화점〉을 다시 본 건, 시집에 있는 몇몇 구절 때문이었다. 시집에는 에이즈와 게이에 관한 시구*가 종종 등장하는데, 이들은 날카로운 냉소를 품고 위정자와 권력을 비판하는 다른 시구와는 달리 영 시원찮았다. 에이즈에 관한 객관적 정보가 부재했던 시절에 쓰인 시라는 점을 감안해야겠지만, 그럼에도 시인의 풍자가 때때로 어처구니없는 방향으로 향하다 고꾸라졌다는 아쉬움은 어쩔 수 없었다.


  영화감독이 된 시인이 뒤늦게나마 잘못된 풍자를 사죄하는 마음으로 〈쌍화점〉을 만든 것 같지는 않다. 영화에서 게이 코드는 치정·파국을 강조하기 위한 설정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는 게이에 관한 유의미한 통찰을 제공하기도 한다. 감독이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그는 잘못 흩뿌려진 시구를 영화를 통해 조금이나마 주워담는 데 성공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영화의 배경은 원나라의 간섭이 극에 달한 고려 말기다. 왕권이 취약했기에 암살 시도가 잇따랐고, 이에 고려는 ‘건룡위’를 구성해 귀족 자제 중 미동(美童)을 선발해 호위무사들을 양성했다. 왕은 그중에서도 건룡위의 수장 홍림을 각별히 아꼈고, 이 감정은 함께 성장해가며 사랑으로 바뀌었다. 왕과 홍림은 군신의 신뢰와 연인의 애정이 결합된 복합적 관계를 형성해 나간다.



  왕과 홍림의 결속 관계는 후사 문제로 원나라가 압박을 가하면서 변곡점을 맞는다. 왕이 매일 밤 남자인 홍림만 침소에 들이니 후사가 있을 리 없다. 원나라는 이를 빌미로 고려를 계속 압박하며 무리한 요구를 지속한다. 이에 왕이 꾀를 낸다. 홍림과 왕후를 합방시켜 후사 문제를 해결하려 한 것이다. 홍림과 왕후는 둘 다 왕의 계획에 반대하지만, 왕의 설득에 끝내 마음을 돌리고 내키지 않는 정사를 치른다.


  그런데 왕이 예측하지 못한 일이 벌어진다. 홍림과 왕후 사이에 육욕에 기반한 감정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왕은 배신감과 충격에 휩싸여 홍림의 마음을 다시 자신에게로 돌리려 애쓴다. 군신 사이의 ‘충심’을 요구하거나, 왕의 권력으로 홍림의 마음을 강제하려는 식이다. 그럼에도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자 왕은 점차 추악해진다. 홍림 대신 다른 건룡위 무사를 왕후와 동침하게 하려는 게 대표적이다. 왕후를 사랑하는 홍림의 마음에 상처를 주기 위해 왕후의 몸을 욕보이는 여성 혐오적 방식까지 동원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시도에도 불구하고 홍림의 마음은 점차 왕에게서 멀어져 왕후에게로 향한다.



  좌절한 왕이 최종적으로 선택한 형벌은 거세다. 홍림을 거세하는 왕의 시도에는 복합적 의미가 담겨 있다. 홍림이 왕후와 처음 동침한 직후, 즉 아직 홍림의 마음이 왕에게 있었던 때 왕은 홍림에게 ‘사내가 된 기분’이 어떤지 묻는다. 왕의 질문은 기묘한데, 여자를 품은 자만 ‘사내’일 수 있다는 말은 여자와 잠자리를 갖지 못하는 자신이 ‘사내’이지 못함을 고백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더불어 이 말은 홍림과 자신, 즉 이성애자와 동성애자 사이의 넘을 수 없는 간극을 상징하기도 한다. 홍림은 ‘사내’가 됨으로써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몸, 수치심을 동반하지 않는 사랑을 나누는 몸인 이성애자의 몸으로 거듭날 수 있다. 하지만 여자와 섹스하지 못하는 왕은 그럴 수 없다. 사내가 될 가능성을 박탈당한 그의 몸은 애초부터 멀어져 가는 홍림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비극적 운명을 품고 있는 셈이다. 홍림을 거세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왕의 분노에 찬 표정에는 이 모든 열등감이 켜켜이 쌓여 있다.


  거세 명령에 담긴 건 열등감뿐만이 아니다. 왕이 홍림에게 거세라는 형벌을 내린 건 자신이 그에게 부여한 남성성을 회수하겠다는 명령이다. 나아가 그럼으로써 ‘사내’가 되기 전의 홍림으로 돌아오라는(즉 ‘열등한’ 세계에서 함께 머물러 달라는) 간절한 요청이기도 하다. 그러나 홍림은 거세된 상태에서도 왕후를 향한 마음을 접지 않고 왕과 함께한 과거를 부정함으로써 왕에게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거부를 통보한다. 비록 모든 것을 잃었을지라도, 다시는 수치스러웠던 열등한 과거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것이다.



  파국이 닥치기 전, 왕과 밤마다 침상에서 놀아나는 것 아니냐는 부하의 비아냥에 홍림이 크게 분노하며 왕을 모욕하지 말라고 윽박지르는 장면이 있다. 하지만 이는 왕의 상대인 자신을 모욕한 것에 대한 분노이기도 하다. 즉, 왕후와의 동침 이전부터 홍림에게 왕과의 관계는 수치스러운 것이었다. 자신에게 돌아오라는 왕의 간절한 요청을 거부하는 홍림의 말은 더 이상 수치심을 품은 동성애자의 자리에 머물지 않겠다는 홍림의 자기선언이기도 한 것이다. 사랑하는 연인에게 ‘상승’의 기회를 준 왕의 실수와 한 번 경험한 이성애 특권을 포기할 수 없는 홍림의 관계가 끝내 파국으로 치닫는 건 당연한 결말이다.


  〈쌍화점〉은 남성성의 부재, 동성애자가 이성애자에게 느끼는 열등감을 처절한 멜로드라마와 결합한 수작이다. 이 영화는 수위는 높은데 어딘가 어색한 베드신이 많은 영화 정도로만 회자되어 왔지만 홍림과 왕 사이의 말·감정은 조금 더 유심히 살펴볼 만한 가치가 있다. 이성애가 규범인 세계에서 동성애자가 느끼는 열등감의 측면에서 봤을 때 특히 그렇다. 적어도 내게는, 《무림일기》의 어설픈 풍자가 〈쌍화점〉으로 어느 정도 만회된 듯싶다.



*“똥구멍에 삽입하는 놈들”(〈교묘한 닭똥집〉), “(에이즈에 걸려) 시름시름 앓다가 몸이 썩어 죽는”(〈모기떼의 습격―무림일기 6〉)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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