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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wr Jan 27. 2022

존재의 '취약함'에 관하여

영화 〈범죄소년〉(2012) 리뷰


  ‘취약하다’의 사전적 정의는 ‘무르고 약하다’이다. 나약함을 연상시키는 뜻이다. 하지만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다. 개별적 존재의 약함이 아니라 사회적 존재로서의 연결망이 부족하다는 의미로 취약함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전자의 관점에서 보면 강한 것이 예찬되고 약한 것은 지양해야 할 상태가 되지만, 후자의 관점을 취하면 존재 간 연결망을 확충함으로써 취약한 존재를 그렇지 않은 상태로 끌어올릴 가능성을 상상할 윤리적 책임이 중요해진다.



  영화 〈범죄소년〉은 취약함의 두 번째 측면을 고민해보게끔 한다. 주인공은 중학생인 장지구다. 그는 당뇨병 합병증으로 건강이 매우 좋지 않은 외할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다. 폭행, 절도 등 몇 건의 전과가 있어 보호관찰을 받고 있기도 하다. 그러던 중 친구들과 어울리다 분위기에 휩쓸려 또 한 번의 절도를 저지르고 소년원에 1년 가까이 수감된다.


  출소를 앞둔 지구는 할아버지가 죽은 후 한참 뒤에야 사회복지사에게 발견되었다는 소식과 그가 어릴 때 도망갔던 엄마 효승이 자신을 찾는다는 소식을 연달아 듣는다. 지구는 효승과 서먹서먹한 재회를 한다. 형편이 좋지 않은 효승은 지구를 데리고 친구 집에 묵으며 근근이 생활을 이어가는데, 둘은 늦게나마 지금껏 맺지 못한 모자 관계를 조금씩 형성해나간다. 효승과 지구가 전형적인 모성애, 가족주의 담론으로 관계 맺지 않는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효승과 지구는 서로의 취약함을 목격하고 공유하며 거리를 좁힌다. 찜질방에서 돈을 훔치고, 더 이상 도움을 주지 않는 친구네 가게에서 깽판을 치는 효승을 보며 지구가 묘한 동질감을 느끼는 장면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둘 사이의 거리가 한층 가까워지는 또 다른 계기가 있다. 지구는 소년원에 들어가기 전 여자친구 새롬과 잠자리를 가졌는데, 출소 후에야 새롬이 임신과 출산을 했다는 사실을 전해 듣는다. 새롬은 이로 인해 집에서 쫓겨나 청소년 쉼터에서 생활하는 중이고, 아이는 입양을 보낸 상태다. 지구는 어떻게 새롬의 삶을 책임질지를 서툴게나마 고민한다. 이때, 효승이 들려준 이야기에 위로를 얻는다. 효승 역시 이름도 모르는 남자와 하룻밤을 보내고 지구를 낳았다는 걸, 그래서 힘든 시간을 보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된 것이다.


  하지만 지구와 효승 그리고 새롬이 서로의 기댈 곳이 되어 규범적 가족주의에 포섭되지 않는 관계를 만드려던 찰나, 모든 것이 어그러진다. 지구와 새롬의 사연을 들은 효승은 아들이 자신이 입은 상처를 다른 누군가에게 똑같이 반복했다는 점을 견디지 못하고, 지구는 자신을 모욕하는 친구를 폭행하여 소년원에 재수감되며, 이로 인해 지구에게 조금이나마 열렸던 새롬의 마음은 또다시 갈 곳을 잃는다. 아무것도 없었던 이들이 형성한 취약한 관계는 많은 것을 가진 자들의 관계와 달리 조그마한 충격에도 산산조각이 나버린다. 이들이 ‘정상가족’을 이루고 있었다면, 상대적으로 양호한 계급적 조건을 공유하고 있었다면, 공적 영역의 관심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이들 사이의 균열은 위기를 딛고 오히려 더욱 돈독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구와 효승, 새롬은 그러지 못한다. 이들이 ‘취약하기’ 때문이다.



  〈범죄소년〉이 생생하게 보여주듯, 자꾸 미끄러지기만 하는 존재들은 ‘스스로의 선택’, ‘게으름’ 때문에 망가지는 것이 아니다. 이들이 자꾸 더 낮은 곳으로 떨어지는 건, 기울어진 미끄럼틀에서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다가 힘이 달려 더 이상 버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노력’, ‘기회’와 같은 말이 허망한 이유다. 효승, 지구, 새롬은 그 누구보다 치열했다. 다만 그 치열함이 성과로 이어질 수 없는 삶의 조건에 놓여 있었기에 '노력'에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했다. 삶의 취약함에 대한 우리의 척박한 상상력은 더 풍성해질 필요가 있다. 능력주의가 공정한 것인 양 회자되는 요즘 같은 때는 더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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