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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wr Dec 15. 2020

영화적 아이러니에 대한 허먼 J. 맹키위츠의 대답

넷플릭스 영화 〈맹크〉(2020)

 넷플릭스 영화 〈맹크〉(2020)에 따르면, 전설이 된 영화 〈시민 케인〉(1941)은 각본가를 쥐어짜는 할리우드의 '착즙' 시스템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거대 영화사는 영화를 공산품처럼 만들고 싶어 하며, 각본가가 그 과정에 기계처럼 녹아들길 바랐다. 한편, 영화는 공산품인 동시에 정치적 선전물이기도 했다.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 출마한 영화사 대표가 상대 후보의 당선이 이주자 유입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영상을 제작하는 장면은 영화와 정치의 구린내 나는 결탁이 꽤 오랜 역사를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런 환경에서 어떻게 걸작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자본주의적 착취와 질 낮은 정치와의 결합이 하나의 '전통'으로 자리 잡은 영화판에서 어떻게 수많은 사람의 영혼을 흔드는 '작품'이 나올 수 있는 걸까?


  이 질문은 비단 〈시민 케인〉의 시대에 한정되지 않는다. 현대사회의 영화는 1930년대의 할리우드보다 더 깊게 자본에 영향을 받는다. 블록버스터 영화, 상업 영화는 지배 이데올로기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확대 재생산하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는 산업에 완전히 잠식되지 '않았다'. 영화는 여전히 저항의 가능성을 담지하고 있다. 영화는 사람들의 상상력을 지배 이데올로기에 포획하는 동시에, 이를 넘어서는 상상력을 가능케 해준다.


  〈맹크〉는 이러한 영화적 아이러니에 대한 대답이다. 영화사 대표 윌리의 말처럼, 각본가는 ‘오르간 연주자의 원숭이’에 불과하다. 오르간 연주자의 원숭이는 자신이 춤을 추면 사람들이 오르간 연주자에게 돈을 주는 것을 보고는 자신이 없으면 오르간 연주자가 굶어 죽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리고는 자신을 오르간 연주자의 ‘주인’이라 여긴다.


  하지만 정작 원숭이에게 밥을 주고, 옷을 입혀 춤추게 하는 것은 오르간 연주자다. 자신에게 월급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권위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 즉 권력과 돈 앞에서 예술가 정체성을 굽히지 않는 각본가 맹크에게 윌리가 건네는 이야기다. 요컨대, 오르간 연주자는 영화사 대표인 자신이고, 맹크는 자신이 세상의 주인인 줄 착각하는 원숭이일 뿐이라는 것이다.


  ‘오르간 연주자의 원숭이’ 우화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오르간 연주자가 원숭이를 먹이고 예쁘게 꾸미려면, 춤추는 원숭이에 기꺼이 돈을 내는 관객들이 필요하다. 오르간 연주로만은 사람들을 사로잡을 수 없지만, 춤추는 원숭이가 있으면 사람들은 기꺼이 그의 연주에 돈을 낸다. 결국 오르간 연주자가 계속 오르간 연주자일 수 있는 이유는 원숭이의 존재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자신의 저서 《유행의 시대》에서 예술가를 관리하는 주체가 국가에서 시장으로 바뀌었음을 비판하긴 하지만, 예술 활동에 있어서 관리행정은 본질적인 요소라고 말한 바 있다. 반면, ‘작가 정신’이란 그 어디에도 종속되지 않는 ‘가난한 자유’에서 나온다는 전통적인 예술론도 있다.


  무엇이 정답인지는 제쳐두더라도, 오르간 연주자의 원숭이에게도 자율성이 있다는 건 분명하다. 원숭이가 가진 자율성의 조건과 크기를 어떻게 해석할지에 대한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 누구도 원숭이가 가진 자율성 그 자체를 부정할 순 없다. 원숭이가 어떤 춤을 추는지에 따라 오르간 연주자의 수입도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맹크〉는 〈시민 케인〉이라는 걸작을 탄생시킨 원숭이의 자율성을 긍정적으로 해석했다.


  다시 영화의 아이러니로 돌아와 보자. 자본이 없으면 영화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영화는 폭력적인 이데올로기의 하수인 역할을 맡기 일쑤다. 예나 지금이나 대부분의 영화가 구린 이유다. 하지만 그럼에도 영화 산업이 이어질 수 있는 건, 빛나는 영화가 드물게나마 계속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이는 오르간 연주자의 돈으로 밥을 먹는, 춤추는 원숭이 덕분이다. 원숭이의 생존은 연주자에게 달려있지만, 최소한의 생존을 보장받는 순간, 원숭이는 자신이 추고 싶은 춤을 춘다. 오르간 연주자가 통제할 수 없는 춤을.


  원숭이의 자율성이나마 존재하는 한, 빛나는 영화는 계속 만들어질 것이고, 영화 산업은 망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영화의 아이러니에 대한 〈맹크〉의 대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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