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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wr Dec 19. 2020

'황폐함'이라는 문제에 관하여

넷플릭스 영화 〈사냥의 시간〉(2020)

  '탈조선'이란 용어가 유행한 적이 있다. 망한 조선(대한민국)을 탈출하겠다는 욕망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지금은 탈조선이라는 말이 이전처럼 자주 쓰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 말을 가능케 했던 조건은 그대로다. 세상은 여전히 황폐하고, 청년들은 다른 삶을 꿈꾼다. 영화 〈사냥의 시간〉은 탈조선 담론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다.


  "지옥", "미쳐 돌아가는 세상", "더는 잃을 게 없는", "성실하게 살아도 좆같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네 청년이 있다. 그중 준석(이제훈 배우)은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 하와이를 닮은, 대만의 한 투명한 바다에서 소박한 가게를 운영하며 살아가는 그런 삶을. 준석은 망한 세상을 탈출해 꿈을 이룰 수 있을까?


  준석과 그 친구들은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불법 도박장을 턴다. 꿈이 실현되기 직전이다. 그런데 정체불명의 추격자 '한'이 따라붙는다. 그에게 이유는 없다. 준석 패거리가 훔친 돈이나 하드디스크를 되찾으려는 것도 아니고, 죽이려는 것도 아니다. 그는 그저 사냥을 즐기는 자다. 


  알 수 없는 추격자 '한'은 망한 세상의 은유다. 세상이 그러했듯이, 한 역시 준석과 친구들을 극한으로 몰아붙인다. 다만, 세상이 그들에게 가한 폭력이 광범위하고 간접적이었다면, 한이 그들에게 휘두르는 폭력은 집약적이고 물리적이라는 점만 다르다.


  준석과 친구들은 세상과 한에게 저항하지 못한다. 그저 도망치거나 탈출을 꿈꿀 뿐이다. 그들이 원인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변화는 원인과 구조를 조망할 수 있는 자들의 용어다. 이미 망한 세상에서 태어난, 정체를 알 수 없는 추격자에게 쫓기는 그들에겐 원인과 구조를 조망할 시간이 없었다. 태어나 보니 이미 막다른 길이었기에 이를 당연히 여기며 살았다. 그래서 저항이 아닌 탈출을 꿈꾸며 근근이 살아왔다. 준석은 결정적인 순간에야 깨닫는다. 모든 걸 끝내기 위해서는 탈출이 아닌 근본적 단절이 필요하다는 것을.


  한을 죽이고 대만으로 가 자신이 꿈꾸던 삶을 살던 준석이 한국으로 돌아오는 이유다. 그는 한을 죽인 후에도 후련하지 않다. 애초에 왜 한이 자신을 쫓았는지 알지 못했기에 탈출했을 때의 해방감도 명확하지 않은 것이다. 준석은 망한 세상이 존재하는 한 '한'과 같은 추격자는 언제든지 다시 나타날 수 있음을 안다. 그래서 준석은 한국으로 돌아온다. 이제는 탈출이 아닌 변화를 모색해야 할 때다.


  영화의 중후반부 전개는 다소 모호하고 맥이 없다. 비주얼도, 정서도, 긴장감도 빼어난 영화가 갑자기 길을 잃고 방황하는 듯해 안타까웠다. 하지만 영화 중후반부의 엉성함이 그 자체로 혼란스러운 준석의 내면과 세계인식을 상징한다면 어떨까? 애초에 감독이 망한 세상과 한의 정체를 까발리는 것에 초점을 맞춘 게 아니었다면? 탈출만 꿈꾸던 준석이 새로이 각성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면? 이유를 알 수 없는 폭력에 도망치기 급급했던 준석이 싸우기로 결정하기까지의 혼란이 중요한 것이었다면?  이런 해석은 과한 의미부여일까?


  <사냥의 시간>의 준석에게서 <파수꾼>의 기태가 보였다. 같은 배우가 비슷한 톤으로 연기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기태에게 내면의 황폐함이 문제였다면, 준석에게는 세상의 황폐함이 문제다. 내면의 황폐함에 상처 받은 <파수꾼>의 기태는 세상의 황폐함과 마주한 <사냥의 시간>의 준석으로 성장했다. 황폐함의 문제를 집요하게 다뤄 온 윤성현 감독이 '이제훈의 얼굴'로 또 다른 황폐함을 다루는 영화를 내기를, 기대한다.



  덧. <파수꾼>, <사냥이 시간>에 남자 주인공과 적당히 어울리다 어느 순간 사라지는 여성 캐릭터가 없다는 점도 좋았다. 구색 맞추기 식으로 껴 맞춰 엉뚱하고 문제적으로 여성 캐릭터를 재현하기보다는 차라리 없는 게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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