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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wr Dec 16. 2022

‘퀴어의 사랑’을 ‘보편의 사랑’이라 말하지 말 것

〈캐롤〉 리뷰

7★/10★


  울리히 슈미트가 쓴《동물들의 비밀신호》에는 ‘코끼리 떨림’이라는 말이 나온다. 코끼리를 사냥하기 전, 사냥꾼들의 몸이 덜덜 떨리는 현상을 지칭하는 표현이라고 한다. 코끼리를 향한 공포, 경외, 정복욕 등을 포괄하는 신비한 경험을 일컫는 단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코끼리 떨림에는 과학적 근거가 있었다. 동물학자들은 코끼리가 우거진 수풀을 거뜬히 통과하는 강력한 음파로 최대 10킬로미터 떨어진 무리와도 소통할 수 있음을 알아냈다. 코끼리가 뿜어내는 음파가 인간의 가청한계에 미치지 못하는 13~24헤르츠였기에 코끼리 사냥꾼이 소리를 듣지 못하고 떨림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2016년 개봉한 영화 〈캐롤〉을 다시 보며 《동물들의 비밀신호》가 떠오른 이유가 있다. 〈캐롤〉은 이성애가 규범인 세상에서 위태로운 사랑을 이어가는 두 여성 퀴어의 이야기다. 퀴어와 동물은 남들이 모르는 자신들만의 소통 방식을 가졌다는 점에서 닮은 구석이 있다. 코끼리 떨림은 코끼리들의 정교한 의사소통이지만 이를 제대로 들을 수 없는 인간에게는 공포심을 남긴다. 퀴어도 마찬가지다. 남들 눈에 띄지 않게 가능한 조심스레 진행되는 퀴어들의 정교한 의사소통은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남긴다. 두 공포심 모두 코끼리의 언어와 퀴어의 정교하고도 비밀스러운 의사소통을 해석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무능에서 비롯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코끼리와 퀴어를 비난한다. 왜 자신에게 불쾌한 공포감을 심어주느냐는 불만이다. 이들의 선택지에 타자의 언어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없다. 그들이 가장 힘 있는 존재이고, 모두가 그들의 말을 알아서 해석해주기에 타자의 언어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캐롤〉을 비롯한 웰메이드 퀴어 영화가 곧잘 마주하는 평이 있다. ‘퀴어의 사랑은 외피일 뿐, 이 영화는 보편의 사랑을 말한다’라는 평 말이다. 이런 유의 평가는 종종 ‘이 영화는 퀴어 영화가 아니다’라는 말로도 이어진다. 분명 ‘칭찬’이다. '특수한 소재'를 잘 파고들어 '보편적 메시지'를 전했다는 긍정적 의미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특정 소재에 천착한 영화가 ‘보편적 울림’을 준다고 느껴 감동하는 일이 많다.


  그러나 이런 평가는 늘 세심하고 조심스러워야 한다. ‘특수’한 자들이 보내는 ‘비밀신호’가 제대로 독해되기도 전에 ‘보편’을 운운하면 의도와 상관없이 보편이 특수를 삼켜버리는 결과가 초래되기 때문이다. 〈캐롤〉이 개봉했을 때도 비슷한 논란이 있었다. 이 영화에서 레즈비언 로맨스라는 소재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두 주인공이 나누는 사랑 자체에 초점을 맞춰 영화를 감상하자는 유의 주장이었다. 퀴어가 주변부에 자리하는 사회에서 이런 주장은 대개 영화의 퀴어적 성격을 재빠르게 삭제하는 효과를 야기한다. 레즈비언 로맨스여야만 가능한 장면과 감정이 있는데 이를 깊이 있게 해석하는 대신 ‘위대한 사랑’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캐롤〉을 다시 보며 두 주인공 캐롤과 테레즈가 퀴어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에 주목했다. 쇼핑할 때면 긴장하는 귀부인 캐롤(쇼핑하며 긴장하는 귀부인이라니 얼마나 ‘이상’한가!), 책을 ‘과하게’ 많이 보는 테레즈, 결혼한 여성을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누군가의 ‘처’라고 부르는 걸 견디지 못하는/본인이 좋다는데 여자가 담배 피우는 게 뭐가 어떠냐는 캐롤(이 말이 얼마나 당대 윤리 규범에 비추어 얼마나 ‘이상’한지 생각해보라!), 벨리벳이라는 체코풍의 ‘특이한’ 성을 쓰는 테레즈와 이를 마음에 들어 하는 캐롤, ‘당신은 못할 짓이 없는 여자야’라는 캐롤 남편의 말(즉 캐롤이 ‘위험한’ 여자라는 말), 이성애 가족의 가치를 행복하게 묘사하는 라디오를 꺼버리는 캐롤, 레코드숍에서 캐롤을 위한 선물을 고르는 테레즈를 노골적으로 응시하는 레즈비언 커플, 린치 당한 후 나무에 매달린 흑인을 ‘이상한 과일(strange fruit)’이라고 은유한 재즈 가수 빌리 홀리데이의 앨범을 캐롤에게 선물하는 테레즈……. 요컨대 (위험하지만 우아하고, 도전적이면서도 품위 있는) 캐롤과 (레즈비언 이미지로서의 캐롤을 흑인 인권운동의 연장선에 위치시키려는) 선물이 있다. 이외에도 테레즈와 캐롤이 ‘이상하고 특이한’ 존재, 즉 퀴어임을 보이는 설정과 장면은 영화에 무수히 많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특징들 때문에 캐롤과 테레즈는 서로에게 사랑에 빠진다.



  여행을 떠난 둘이 길고 긴 탐색전 끝에 마침내 섹스하는 장면을 보자. 이들이 이성애 커플이었다면 섹스까지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릴 필요가 없다(눈빛만으로 서로의 마음을 읽고 침대로 달려가는 영화 속 수많은 이성애 커플을 떠올려보자!). 하지만 둘은 그럴 수 없다. 서로에 대한 호감이 성애적 암시를 가졌는지를 신중히 살펴야 한다. 혹시라도 오해해서 섣불리 다가갔다가는 모든 것을 망칠 수도 있다. 이들의 베드신이 아름다운 건 이 때문이다. 그토록 정교하고 조심스러운 탐색전 끝에야 마침내 서로가 같은 욕망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서 오는 애타는 감동이 둘의 베드신에서 전해지는 것이다.


  사진 찍기가 취미인 테레즈가 캐롤의 모습을 담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지금껏 이성애자로 살았던 테레즈는 레즈비언 로맨스 덕에 알게 된 새로운 세계의 미학적 상징으로서 캐롤의 아름다움에 몰두하며 그녀를 촬영한다. 즉 테레즈에게 캐롤의 사진을 찍는 일은 사랑하는 연인의 모습을 간직하고자 하는 욕망인 동시에 여태 알지 못한 미학을 적극적으로 탐닉하는 레즈비언 신참자의 열정이기도 하다.


  〈캐롤〉을 레즈비언 선배가 신참자를 못살게 구는 영화로 해석할 수도 있다. 풍부한 레즈비언 로맨스 경험, 재력, 연륜을 갖춘 캐롤은 이제 막 레즈비언 로맨스에 눈을 뜬 테레즈에게 여행을 제안하고, 사랑을 나눈 후, 자신의 사정 때문에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했다가, 마음이 바뀌어 다시 테레즈에게 동거를 제안한다. 레즈비언인 캐롤이 이성애 결혼 제도 안에서 양육권과 이혼 문제로 힘든 시기를 보낸 건 사실이지만, 그녀가 자기 마음대로 테레즈에게 접근했다 버리는 등 멋대로 구는 것도 사실이다. 다만 이런 해석을 위해서는 레즈비언 로맨스의 신참과 고참 사이에 존재하는 권력 격차에 대한 이해와 이성애 규범적인 사회를 살아가는 레즈비언의 삶에 대한 이해가 필수다. 이런 이해가 선행되지 않으면 관계의 복잡한 맥락을 뭉뚱그려버릴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캐롤〉에는 두 주인공이 레즈비언이었기에 가능한 여러 복잡한 감정선들이 나온다. 〈캐롤〉을 비롯한 웰메이드 퀴어 영화를 ‘보편적 사랑’에 관한 영화라 상찬하기 전에, 왜 이들 영화가 퀴어의 사랑에 천착했는지에 관한 고민이 필요한 이유다. 주변부로 밀려난 자들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주류와는 다른 아름다운 관계의 문법을 창조해낸다. 이러한 권력관계에 대한 인식 없는 퀴어 로맨스 상찬은 퀴어를 계속 주변부에 두겠다는 무의식의 표현에 불과하다. 퀴어 영화를 ‘퀴어’하게 보자. ‘보편적 사랑’ 운운은 그다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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