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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wr Aug 10. 2023

기대한 감동을 초과하는 퀴어 영화

〈퀴어 마이 프렌즈〉 리뷰

7★/10★


  사실 〈퀴어 마이 프렌즈〉의 소개글을 보고 ‘적당한’ 감동을 기대했다. 보수적인 기독교 공동체에서 성장한 감독 아현과 남성 동성애자 강원, 강원의 커밍아웃으로 세계가 흔들리는 듯한 충격을 받은 아현, 그리고 카메라를 들고 7년간 강원의 모습을 담는 아현……. 몰랐던 세계를 조금씩 알아가며 서로를 이해하고 마침내 행복해지는 그런 이야기 말이다.     


  그러나 〈퀴어 마이 프렌즈〉는 기대한 감동을 초과한다. 이 영화가 퀴어‧우정을 다루는 영화의 전형성을 비껴 가기 때문이다. 핵심은 ‘실패’다. 강원과 자신이 지나온 혼란의 시간을 갈무리한 뒤, 아현은 퀴어문화축제 무대에서 공연하는 강원의 모습으로 영화를 마무리하려 계획했다. 여러 어려움을 자긍심으로 승화하는 강원의 공연과 이를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카메라에 담는 아현의 모습은 영화의 완벽한 결말, 꽤 괜찮은 해피엔딩이 되어줄 터였다. 하지만 정신적‧심리적 문제로 힘겨워하던 강원은 무대에 서지 못한다. 그리고 〈퀴어 마이 프렌즈〉는 여기서부터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우정과 성장이란 무엇인지를 질문한다.     



  퀴어문화축제에 참석한 아현이 축제 참가자들과 반대편의 혐오세력을 번갈아 바라보는 장면이 있다. 아현은 생각한다. ‘강원이 아니었다면 나는 어디에 서 있을까?’ 그녀가 편안함과 당위성을 느끼며 성장해온 세계에서 동성애는 죄악이었다. 친한 친구였던 강원의 커밍아웃이 아니었다면 아현은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오히려 확신에 찬 표정으로 길 건너편에서 축제 참가자들에게 소리를 질렀을지도 모른다. 아현이 그들과 달랐던 건 딱 하나, 강원이 그녀의 친구였다는 점이다. 즉, 아현은 강원과의 관계맺음으로 자신이 속했던 세계를 '배반'하고 세계를 확장해왔다.     


  이 확장은 아현과 강원 관계의 ‘역전’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대학원을 졸업했지만 30대가 되도록 번듯한 직장을 구하지 못했고 결혼도 하지 못한 아현은 ‘정상적인’ 성인에게 으레 기대되는 삶의 궤적에서 자꾸 멀어지는 중이다. 그런 아현의 서사는 미국 시민권 취득해 미군으로 복무하고, 애인과의 오랜 파트너십을 형성한 강원의 서사와 대비된다. 이성애와 동성애라는 차이에만 주목했을 때는 삶의 무게추가 아현 쪽으로 기운 듯 보이지만, 구체적 삶의 조건을 쌓아가는 과정에서는 이 관계의 균형의 뒤집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강원은 삶에 온전히 안착하지 못한다. 명확한 이유를 알 수 없는, 아마도 퀴어라는 정체성과 관련이 있을 정신적‧심리적 문제가 계속 그를 붙잡기 때문이다. 요컨대 둘은 모두 ‘실패’하고 무너진다.     



  서로 다른 두 인물의 실패는 기묘한 방식으로 포개진다. 강원이 퀴어문화축제 무대에 서지 못한 날 밤, 둘은 지금껏 하지 못한 말을 털어놓는다. ‘속 깊은 대화’라기보다는 ‘격정적 토로’에 가까운 대화였다. 아현은 영화감독과 강원의 친구라는 두 정체성이 혼동되는 상황, 즉 영화가 아니었다면 자신이 강원을 살뜰히 챙기지 않았을 거라는 의심에 반박한다. 강원은 미칠 것 같이 힘들고 혼자 있기만으로도 벅찬데 카메라와 아현을 자기 삶에 들여야만 하는 상황에 부담을 표한다. 이 장면에서 ‘두 실패한 자’들은 자신의 바닥을 내보인다. 그리고 ‘실패’를 토대 삼은 둘의 우정은 더는 끊어낼 수 없을 정도로, 축축하고 질척하게 다져진다.     


  만약 강원이 아현의 기대대로 퀴어문화축제에서 멋지게 무대를 마무리하고, 영화가 거기서 끝난다면 어땠을까? 물론 그것만으로도 적당할 것이다. 모든 퀴어가 불행할 필요는 없고, 자신이 겪은 문제를 춤으로 승화해내는 강원의 모습은 분명 감동을 자아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피엔딩’은 아현과 강원의 현실을 '왜곡'한다. 그들은 현실에서 불안하고 괴롭기 때문이다. 그날 하루의 공연이 모든 것을 반전시켜 줄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패’의 순간에 천착한다면? 아현과 강원, 그리고 영화가 애초에 계획한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과정은 개별 관객이 가지고 있을 실패의 순간과 접속하며 그들의 위치를 ‘관람자’가 아닌 ‘참여자’로 전환해낸다. 그리고 영화는 망해버린 자리, 남은 건 서로밖에 없는 상태에서 끙끙대며 버텨낼 방법을 함께 고민하자고 제안한다. 이것이 바로 〈퀴어 마이 프렌즈〉가 기대를 초과하는 감동을 자아내는 지점이다. ‘모든 실패한 자’들이 아현과 강원의 여정에 동참할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다. ‘나에게 너의 세계를 열어줘서 고마워’라는 아현의 내레이션은 관객이 강원과 아현에게도 똑같이 건넬 수 있는 말이다. 불행한 현실을 비트는 해피엔딩도 좋지만, 그런 현재마저도 긍정하는 ‘실패’에 관한 영화도 좋다. 〈퀴어 마이 프렌즈〉가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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