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ewr Oct 16. 2023

〈똥파리〉 이후 15년, 그리고 〈화란〉

〈화란〉 리뷰

7★/10★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된 글입니다.


  한 고등학교의 운동장. 학생 제 손에 주먹만 한 돌을 들고 운동장을 가로지른다. 그러고는 동급생의 머리에 그 돌을 냅다 내리꽂는다. 가격당한 학생은 쓰러진 후 소리를 지르고, 저 멀리서는 선생님으로 보이는 사람이 달려온다. 연규의 손에 들려 있던 돌은 운동장의 조그만 물웅덩이에 떨어진다. 돌에는 피가 묻어 있다. 물웅덩이의 흙탕물 사이로 붉은 색 피가 조금씩 퍼져나간다. 영화 〈화란〉의 시작이다.     


  〈화란〉의 오프닝은 이 영화가 출구 없는 폭력의 연쇄를 다룰 것임을 암시한다. 연규는 가난한 재혼 가정의 고등학생 아이로, 새아빠의 딸이자 이복 여동생 하얀을 괴롭히는 동급생을 응징하기 위해 돌을 손에 들었다. 연규가 하얀을 특별히 아껴서는 아니다. 연규는 엄마에게 자신의 행동을 변명하며 ‘그래도 같이 사는 사람’인데 그냥 지켜만 볼 수는 없었다고 말한다. 문제는 정작 연규가 ‘같이 사는’ 새아빠에게 수도 없이 구타당한다는 점이다. 새아빠는 발소리, 숨소리만으로 연규를 얼어붙게 만든다. 오랫동안 마음에 새겨진 폭력은 그렇게 작동한다.     



  하얀을 위하는 연규의 마음은 그럴듯하다. 하지만 그것과 현실의 합의금은 별개의 문제다. 연규는 당장 300만 원을 마련해야만 한다. 엄마는 돈이 없다. 새아빠에게 말했다가는 또다시 죽을 듯 맞을 것이 뻔하다. 300만 원은 아르바이트 비용을 가불해 지급하기에는 터무니없이 큰 금액이다. 궁지에 몰린 연규에게 구원자가 나타난다. 연규의 사정을 알게 된 동네 조직 폭력배 중간 보스인 치건이 부하를 시켜 돈을 전달한 것이다. 연규와 비슷한 환경에서 성장한 치건은 연규에게서 자신을 보았고, 그래서 연규를 도왔다. 그러나 치건의 호의가 마냥 선의의 발현인 것만은 아니다. 치건이 연규에게 건넨 ‘구원’은 그의 세계에 들어오라는 암묵적 초대이기도 하다. 합의금을 손쉽게 마련한 것으로 끝낼지, 아니면 치건의 초대에 응할지는 연규의 몫이다.     


  짐작 가능하듯, 연규는 치건의 길을 따른다. 치건은 연규와 같은 환경에서 자랐지만 연규가 결코 갖지 못할 힘과 돈을 가졌다. 연규는 빠르게 치건의 조직에 적응하고, 그들과 ‘같이 살며’ 가족이 된다. 처음부터 글러먹은 도시, 탈출할 수 없는 절망으로 가득찬 도시에서 자란 치건과 연규는 빠르게 유대를 형성한다. 그러나 동시에 연규는 하얀을 지켜주고자 한 선한 마음을 완전히 저버리지는 않는다. 조직의 냉혹한 문법과 기존 마음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 생기기도 하지만, 연규는 기지와 수완을 발휘해 위기를 모면한다. 그리고 연규가 어떻게든 지켜내고자  그 무엇이 그가 영화의 마지막에 하얀을 오토바이에 태우고 도시 밖으로 나가는 밑절미가 되어준다.     



  치건을 연기한 송중기 배우는 한 인터뷰에서 〈화란〉 시나리오를 보고 양익준 감독의 〈똥파리〉가 떠올랐다고 했다. 나 역시 그랬다. 원인을 알 수 없는 폭력이 도무지 해결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게 엉켜 영속되는 상황. 그리고 그 안에서 서서히 질식되어가는 사람들. 그 적나라한 폭력의 현시에서 우리는 눈을 질끔 감고 고개를 돌리고만 싶다. 그러나 연규를 연기한 홍사빈 배우의 얼굴이 우리의 고개를 다시 스크린으로 돌린다. 절망 속에서 피어난 비천한 희망을 담아내는 그의 연기가 주는 흡인력은 관객으로 하여금 괴로울지라도 영화(그리고 영화가 그려내는 현실)를 응시하도록 붙잡아둔다. 나아가 그가 겪어내는 폭력의 파편을 관객의 몸과 마음에도 새겨 넣는다. 송중기 역시 기존 출연작이 잘 떠오르지 않는 묵직한 연기로 연규가 마주한 구원과 고난의 엄숙함을 증폭시킨다.     


  〈화란〉은 영화 말미에 아주 자그마한 숨구멍을 뚫어 놓는다. 희망이라고 말하기에는 터무니없고, 연규와 하얀이 그럴싸한 미래를 마주할 것 같지도 않지만, 어쨌든 둘은 폐쇄적 폭력의 연쇄의 바깥으로 발걸음을 내딛는다. 이 결말은 연규의 ‘선함’에 대한 보상이 아니다. 연규가 마냥 선한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직의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치건과 오해가 생겨 갈등이 극에 달한 장면에서, 두려움에 질린 연규는 하얀을 담보로 치건과 협상을 벌인다. 즉, 연규는 ‘같이 사는 사람’인 하얀을 하나의 화폐로써 치건에게 지급한다. 연규가 적당한 선함을 가진 건 맞지만, 그가 절대적 선함의 담지자는 아니란 소리다. 사람을 화폐로 제시하는 연규의 이 비겁함은 사회에서 소외된 자를 재현할 때 종종 발생하는 ‘약자는 완벽히 선해야 한다’는 요구를 비틀며 그의 캐릭터에 입체성을 부여한다. 〈똥파리〉 이후 15년, 〈화란〉은 사회와 폭력에 대한 영화적 재현은 얼마나 다르고 같은지를 질문하게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윤리와 미학을 결합한, 당나귀의 여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