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카뮈, 〈전락〉
그는 현대적인 마음의 소유자다. 다시 말해서 남에게 심판받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서둘러 자기 자신을 비판한다. 그러나 그것은 남들을 더 마음껏 심판할 수 있기 위해서다. 그는 자기의 모습을 비춰보던 거울을 결국 다른 사람들 얼굴 앞으로 내민다. 어디서부터가 고백이고 어디서부터가 고발인가?
1956년 발표된 이 소설은 도대체 몇 십 년을 선취하는 걸까? 여기 위선자가 있다. 변호사 장바티스트 클라망스는 장애인을 돕고, 소외당한 자들을 변호한다. 하지만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다. 클라망스는 높은 곳에서 선행을 베푸는 스스로의 모습을 사랑한다. 그러나 클라망스의 자기애의 토대를 깨뜨리는 두 개의 사건이 생긴다. 먼저 도로에서 길을 막고 선 오토바이 운전사와 시비가 붙은 사건은 클라망스에게 그의 위선이 특정한 조건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언제나 모든 상황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다면, 그가 언제나 남들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것이 어렵다면 그의 위선적 자기애는 안정적으로 지속될 수 없다. 두 번째 사건은 어느 여자가 다리 위에서 강물로 뛰어드는 소리를 듣고도 그가 되돌아가지 않은 사건이다. 자기애적 위선의 전시를 봐줄 사람도 없는 한밤중, 자기애의 토대가 불완전함을 깨달은 클라망스는 여자에게 돌아가는 일이 귀찮게 느껴진다.
그러나 자기애적 위선을 잃은 클라망스는 새로운 구원을 찾는다. 자신의 위선을 고백하고 참회하는 일이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성찰하고 반성한다. 더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심판하기 위해서다. 참회자가 재판관이 될 수 있는 건 참회를 통해 권력을 획득할 수 있어서다. 동시대인 모두가 가진 죄를 가장 먼저 고백함으로써 ‘선지자’가 되는 것이다. 그들은 ‘나’의 문제를 ‘우리’의 문제로 뒤바꾼 후 ‘나의 참회를 따르라’고 말한다. 이렇게 클라망스는 다시금 높은 자리에 오른다. 카뮈는 말한다. “선지자들이며 돌팔이 의사들이 마구 불어나서 훌륭한 율법이나 빈틈없는 조직을 내세우며 온 세상에 인적이 없어지기 전에 도착하겠다고 서둘러댑니다.” “다만 내가 원하는 상대를 두들겨 패는 것”, 즉 클라망스가 자기애적 위선으로 추구하고자 한 알량한 권력감만을 추구하는 폭군의 욕망을 가진 자들이 재판할 권리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발 빠르게 참회한다.
카뮈는 이 소설의 제목으로 ‘우리 시대의 주인공’을 고려했다고 하는데, 여기서 ‘우리 시대’는 카뮈의 시대에 한정되지 않는다. 도덕성이 경쟁해 확보해야 할 자원이 되고, 누군가를 단죄할 권력인 곳은 모두 아직 카뮈의 시대를 살고 있다.
장바티스트 클라망스가 닷새 동안 누군가에게 독백하는 형태로 진행되는 이 소설(그리고 연극)의 메시지, 즉 타자를 윤리적 관계의 대상이 아닌 위선과 군림의 대상으로 보는 세태 비판은 카뮈 작품 전반에 걸친 여성‧아시아인 타자화와 묘하게 맞물려 더 선명해지는 아이러니를 자아내기도 한다. 자기애적 위선과 남을 심판하기 위한 참회만이 알맹이 없이 헛되이 부풀려진 현대인의 에고를 달래주고 있다. 인간은 전락轉落했다.
*'전락' 공연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