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뉴클리어 패밀리〉
#1
젊은 남자는 단단히 화가 난 표정이고, 중년 남자는 난처한 듯 안절부절못하는 얼굴이다. 둘은 연인이다. 중년 남자는 가정이 있는, 뒤늦게 자신의 성적 지향을 새로이 발견한 유부남이고 젊은 남자는 가족에게 커밍아웃하지 않고 2년간 머뭇거리기만 한 애인 때문에 속상한 상태다. 젊은 남자가 결정타를 날린다. 당장 오늘 저녁 가족에게 말한 후 자신에게 오지 않으면, 둘의 관계는 끝이라고. 때마침 중년 남자의 아내에게서 전화가 온다. 중년 남자는 생각한다. 어쩌면 오늘이 바로 모든 걸 털어놓아야 하는 날일지 모른다.
#2
근사한 술집. 백수이자 취준생인 아들이 친구를 기다리는 중이다. 5년간 취직 준비를 한 그는 벌써 삼십 대 초반을 훌쩍 넘긴 나이다. 친구가 나타난다. 자기 사업체를 꾸려 TV에 나올 정도로 성공한 친구다. 아들이 자신의 답답한 상황을 한참 설명하고는, 슬쩍 취업 청탁을 넣어본다. 친구는 혀를 찬다. 유학이라도 다녀오면 모를까, 지금 스펙으로는 어림도 없다는 것. 때마침 엄마에게 전화가 온다. 기막힌 타이밍이다. 아들은 어쩌면 엄마가 유학 자금을 대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3
한 유튜버가 카페에서 구독자에게 후원금을 모집 중이다. 그는 지금껏 ‘딸/여자’로 불려왔지만, 사실 그는 오래전부터 자신이 ‘아들/남자’임을 알았다. ‘남자 같은 여자’로 보이는 그는 오랜 시간 수치심과 싸워왔고, 마침내 성 전환 수술을 결심했다. 지금 그는 유튜브 구독자에게 수술 후원금을 모으는 중이다. 그러나 수천만 원에 달하는 수술 비용이 쉽게 모일 리 없다. 때마침 엄마에게 전화가 온다. 혹시… 엄마라면 수실 비용을 마련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4
엄마의 결심은 확고하다. 결혼 후 단 한 번도 한눈 팔지 않고 가족을 부양하는 일에만 집중해온 그녀. 오랜 고민 끝에 그녀는 가족을 떠나 자신만의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 생일인 오늘은 이 결심을 가족에게 선포하는 날이다. 온 가족이 함께하는 마지막 식사일 수도 있으므로 비싸고 맛있는 식사를 준비한다. 남편, 아들, 딸에게도 전화를 걸어 꼭 늦지 않게 집에 들어오라고 당부한다. 그리고 마침내 온 가족이 모였다. 이제 자유 선언의 시간이다.
#5
네 가족 모두는 할 말이 있다. 이들은 모두 절박하다. 모두가 오늘 저녁 식사 자리에서 할 말에 자신의 남은 인생이 걸려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둘 심중에 있는 말을 꺼낸다. 한마디 한마디가 폭탄이다. 문제는 이들이 다른 가족 구성원의 말을 경청하기에는 자기 상황이 너무 급박하다는 것. 때문에 서로의 말에 깜짝 놀라면서도 자기 이야기를 내세우는 데 급급하다. 거대한 혼란의 여파가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재난 경보 사이렌이 울린다. 장르가 변주되고 질문들이 솟구친다. 마주하고 싶지 않은 우리 사회의 민낯이 조금씩 드러난다.
고백하자면, 처음 연극 〈뉴클리어 패밀리〉의 시놉시스를 보고 걱정이 먼저 들었다. 중년 게이, 취준생 백수, FTM 트랜스젠더, 자기 삶을 찾고 싶은 중년 여성. 하나하나 천천히 다뤄도 부족할 캐릭터들이 넷이나 나온다니, 개별 캐릭터의 서사가 자극적으로 소모되다 휘발될 것만 같은 불안이었다. 그러나 연극은 이 불안을 보란 듯이 뛰어넘는다. 유머를 곁들여 가족/구성원이 빚어내는 촌극을 펼쳐낸다. 그러나 마냥 웃음만 자아내는 것은 아니다. 사이렌이 울린 후, 연극의 장르가 코미디에서 스릴러/서스펜스로 전환되면서는 섬뜩한 가족 희비극이 새로이 시작된다.
나는 〈뉴클리어 패밀리〉가 충격적일 정도로 좋았다. 연극이 던지는 화두에 압도되었기 때문이다. 첫째, 우리는 약자들이 자기 고통을 경쟁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서는 지금껏 억눌려왔던 소수자들의 목소리가 분출되기 시작했다. 좋은 일이었다. ‘살 만한 삶’으로 간주되지 않은 자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삶에 대한 기존 상상력이 얼마나 척박했는지를 알려주었다. 그러나 의도치 않은 부작용도 있었다. 아프고 힘든 사람이 너무도 많았던 것이다. 주류 사회는 더 크고 고통스러운 목소리를 선별하고 그에 따른 보상을 차등 배분함으로써 폭발하듯 분출되는 소수자들의 삶에 관한 새로운 통치성을 확립했다. 그리하여 모두가 고통스럽지 않을 방법을 고민하는 대신 자기 고통이 우선 해결되길 바라는 사회가 도래했다. 엄마의 생일날에 모인 이 가족도 마찬가지다. 서로가 얼마나 아팠을지 공감하며 연대하기보다는 너보단 내가 더 힘들었을 거라고 주장한다. 고통의 무게를 측정하는 사회에서 솔직함에 기반한 진정 어린 관계는 도달 불가능한 판타지다.
이는 자연스레 두 번째 화두로 나아간다. 가족이란 무엇인가? 가족은 오랫동안 사회가 돌보지 않는 자들을 돌보는 공간이었고, 마땅히 공적 영역에서 수행되어야 할 돌봄을 별다른 비용 없이 사적인 영역에 떠넘길 수 있는 빌미였다. 근데 그런 가족마저 생존 경쟁터로 변한다면? 서로를 보듬고 지탱해주던, 가장 사적이고 친밀한 공간에서조차 고통을 증명‧호소하고 인정받아야 한다면? 파국이다. 사이렌이 울린 후, 연극이 생존 경쟁터로 변한 가족의 모습을 다루는 모습에서 알 수 있듯 이제 고통스러운 시간을 살아내는 개인에게는 안식처가 없다. 가족마저 경쟁 대상이다. 자신의 아픔이 가장 중요한 시대에는 모든 곳이 생존 경쟁터다.
〈뉴클리어 패밀리〉의 개별 캐릭터 설정과 플롯은 각자도생이라는, 이제는 상식이 된 동시대의 시대정신이 초래한 파국을 다시금 새롭게 환기한다. 리얼함, 핍진성 등 리얼리즘의 관점보다는 각자도생의 명제가 우리 삶에 새겨진 방식을 코미디/스릴러/서스펜스의 장르 문법으로 풀어내는 과정을 좇는 게 이 연극의 더 적절한 감상 방법이란 의미다. 그리하여 한 명씩 사라져 가는 비정한 생존 게임 끝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주변을 돌아보자. 우리는 이미 폐허를 살고 있다. 살아남은 자는 죄인이지만, 그는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모른다. 그에게는 자신이 가장 고통스럽다는, 즉 자신이 가장 가치 있는 존재라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고통을 경쟁하는 사회가 아닌 고통을 나누며 서로를 보듬는 사회, 누군가 자신의 고통을 울부짖기 전에 먼저 그를 보듬는 사회는 정녕 불가능한 것일까? 모두가 경쟁자인 시대에 유일한 생존법은 각자도생뿐이라는, 〈뉴클리어 패밀리〉가 그려낸 우리 사회의 섬뜩한 자화상이 오스스하다.
-극단 고래에서 제공받은 티켓으로 연극을 관람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본문의 사진은 극단 고래의 페이스북(https://www.facebook.com/GoraeTheatre)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연극 〈뉴클리어 패밀리〉는 대학로 시온아트홀에서 9월 14일~17일까지 공연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