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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wr Jun 05. 2023

굴뚝으로 내몰린 노동자들이 써내려간 부조리극

연극 〈굴뚝을 기다리며〉 리뷰


  사무엘 베케트가 1953년 발표한 부조리극 《고도를 기다리며》는 미지의 대상을 향한 희망에 찬 기다림이 절망적으로 배반되는 현실을 고발한 작품이다.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수십 년째 고도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중이다. 고도는 어제도 오지 않았고, 오늘도 오지 않았으며, 내일도 오지 않을 것이다. 이 불합리한 기다림은 ‘내일은 고도가 오겠지’라는 오랫동안 배반당한 믿음으로 유지된다. 둘은 고도라는 이름의 희망에 속박된 상태다.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는 고도는 도대체 무엇일까? 사무엘 베케트는 고도의 의미를 묻는 사람들의 질문에, “내가 그걸 알았다면 작품에 썼을 것”이라 답했다. 아무도 고도(그리고 그가 상징하는 희망)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고도가 등장하기 전, 서구 사회는 확신에 차 무언가를 갈망했다. 중세에는 신, 근대에는 이성과 진보라는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대상’에 자신을 의탁했다. 잘못된 방식일지라도 대체로 이 믿음은 보상을 받았다. 그러나 결국 그들이 마주한 세계는 양차 대전이 남긴 황폐화된 실존뿐이었다. 이제 도대체 무엇에 의탁해 내일을 기대할 것인가. 요컨대, 《고도를 기다리며》는 보편적 가치가 실종된 시대에 서구인들이 마주한 을씨년스러운 황망함이 담겼다.     



  《고도를 기다리며》를 현대적으로 각색한 연극 〈굴뚝을 기다리며〉는 원작에 2018년 시작돼 2019년 종료된 파인텍 노동자들의 투쟁을 들여온다. 2018년, 파인텍 노동자들은 단체협약 과정에서 직접 고용 등의 요구가 묵살되자 75미터 높이의 굴뚝에 올라 426일간 투쟁했다. 노동자와 사측은 ‘극적 타결’ 끝에 협상에 성공했다. 하지만 성공의 대가는 단출했다. 조합원 업무 복귀, 3년간 고용 보장, 금속노조 파인텍지회를 교섭단체로 인정, 최저임금에 1,000원을 더한 기본급 시급, 노조 사무실 제공, 연 500시간의 타임오프(노조 전임자 근로시간 면제).* 새조차 살지 않는 높은 곳에서 두 번의 겨울과 한 번의 여름을 보내고, 단식 농성까지 병행했던 노동자들이 투쟁으로 얻은 것들이다.     


  《고도를 기다리며》와 동시대 노동자들의 열악한 현실을 연결한 〈굴뚝을 기다리며〉의 시도는 그런 면에서 ‘의아’하다. 고도는 구체화될 수 없는 불확실한 희망의 상징이다. 반면 신자유주의 시대 벼랑 끝으로 내몰린 노동자들의 요구조건은 명확하다. 노동 조건 개선, 고용 안정성 강화 등은 고도처럼 추상적이지 않고, 정체가 불분명하지도 않으며, 도달 불가능하지도 않다. 동시대 노동자들의 요구는 우리 사회가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당장 현실로 만들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런데 〈굴뚝을 기다리며〉에서는 이 간단한 요구가 ‘고도(굴뚝)’, 즉 정체불명의 무언가가 된다. 〈굴뚝을 기다리며〉가 던지는 물음은 바로 여기에 있다.     



  굴뚝 위의 누누와 나나. 이들은 굴뚝을 간절히 기다린다.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그러하듯 개연성 없이 자꾸 미끄러질 뿐인 대화를 반복하고 우스꽝스러운 몸짓으로 춤을 추기도 한다. 방문객도 있다. 여러 굴뚝을 오가며 바쁘게 청소하는 노동자, 그런 노동자를 대체하며 자본주의적 프로그래밍에 충실한 AI 청소 로봇, 갓생을 꿈꾸는 청년 BJ. 누누와 나나는 혼란스럽다. 비슷한 처지의 노동자는 누누‧나나와 연대하기에는 너무 바쁘고, AI 로봇은 그들이 당장이라도 손쉽게 대체될 수 있다는 듯 상냥함을 가장한 폭력을 행사하며, 예비 노동자인 청년 BJ는 그들이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하고는 떠난다. 이런 상황에서 누누와 나나의 요구는 점점 설 곳을 잃는다. 요컨대, 노동자들의 요구는 점차 실현 불가능한 무언가가 되어 간다. 굴뚝 위의 누누와 나나가 점차 고립되어 가는 것이다.      


  산업 구조의 변화와 그에 따른 노동 시장 재편으로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한 형태의 노동(그리고 노동자)이 있고, 그만큼 자본의 착취도 교묘해지는 시대다. 이런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는 공장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뭘까? 이들의 노동이 옛날이야기가 아닌 현재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산업이 첨단화되고 인간을 대체하는 인공지능이 경쟁적으로 쏟아지면서, 미래의 생존 가능성에 대한 사회적 두려움은 부풀려지고 사람들은 자기계발에 박차를 가해 불안을 잠식하려 한다. 이 과정에서 서로를 향한 관심은 자연히 사그라든다. 그러나 최첨단의 시대에도 인간이 해야만 하는/하고 있는 노동이 있다. 그리고 이 노동은 그들이 실제로 생한하는 물질적‧사회적 가치에 걸맞은 대우를 받을 필요가 있다. 극 후반부, 쓸쓸한 듯 체념하는 누누와 나나에게서, 나는 외로움을 보았다. 서로 다른 장소에서 서로 다른 형태로 일하는 우리는, 우리가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무언가를 해내고 있다는 사실을 되새기며 서로의 ‘고도(굴뚝)’가 되어주어야 한다. 〈굴뚝을 기다리며〉는 ‘굴뚝’이 ‘고도’가 되어서는, 즉 노동자가 덧없는 희망만 품는 사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간절한 요청이다.      


    

*http://worknworld.kctu.org/news/articleView.html?idxno=249396


-극단 고래에서 제공받은 티켓으로 연극을 관람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연극 〈굴뚝을 기다리며〉는 대학로 연우소극장에서 6월 11일까지 공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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