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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wr Nov 12. 2023

고양이가 죽은 채로 살아 있다

연극 〈우리〉 리뷰


  어지럽다. 아마 의도된 혼란일 것이다. 각각 젠더와 양자역학을 주제로 하는 두 개 연극의 준비과정이 병렬적으로 이어지고, 젠더 공연을 준비하는 1년여의 긴 워크숍 과정과 이 주제에 대한 사람들의 인터뷰는 카메라로 촬영되어 무대 위에 영사된다. 종국에는 페미니즘과 양자역학, 배우들의 연기와 녹화된 화면, 기성세대와 MZ 세대 등 쉬이 섞이기 어려운 주제, 즉 여러 장소와 시간에서 출발한 이들 이야기에서 파생된 것들이 하나로 모인다. 그리고 연극 〈우리〉의 질문이 구체화된다. 얼굴을 맞대고 있으나 소통하지 못하는/소통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응시, 무언가를 시도해보려 했으나 좌절해버린 후의 무기력한 응시 말이다.     



  극단 ‘상어’의 대표 홍예성은 페미니스트 연출가인 이해원에게 젠더 이슈를 다루는 공연을 공동 연출하자고 제안한다. 구조적 사회 문제나 삶의 무게가 사람들에게 안기는 고통에 관한 연극을 주로 만들어왔던 그는, 그 고통의 재현 방법이 특정한 방식(즉 남성적 방식)으로 읽혀 페미니즘의 감수성을 가진 동료와 관객에게 다가가지 못했다는 자각에 이와 같은 일을 기획했다. 50대 남성 홍예성과 페미니스트 이해원은 단원들과 스터디 모임을 꾸려 어떤 연극을 어떻게 만들어갈지를 논의하며 공동의 작업에 착수한다.     


  한편 ‘상어’의 젊은 단원들은 양자역학에 관한 연극도 준비 중이다. 연출자는 무언가가 입자인 동시에 파동일 수 있다는, 물질의 존재 상태에 대한 관찰 결과가 개입자의 유무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양자역학의 주장을 연극적으로 풀어내보려 한다. 기존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만 엄연한 과학적 사실인 양자역학의 세계관을 연출 방식에 도입하면 새롭고 실험적인 결과물이 나올 것 같아서다.     



  서로 다른 주제를 다루는 두 연극은 모두 기존의 언어가 담아내길 포기하거나 주목하지 않은 현실을 연극적으로 풀어보려는 공통점을 갖는다. 하지만 연출자의 야심과 달리, 이들의 공통점은 오히려 갈등의 근거가 된다. 홍예성과 이해원은 사사건건 부딪힌다. 홍예성은 갈등을 이해해보려는 자신의 시도와 노력이 매번 ‘공격적 반응’의 대상이 된다는 데 지치고, 이해원은 홍예성이 오랫동안 기울어져 있던 성별 권력관계를 마주하지 않은 채 ‘소통과 대화’만 외치는 상황이 답답하다. 둘의 관계(그리고 이들의 연극적 시도)는 점차 파국으로 치닫는다. 양자역학 연극도 마찬가지다. 연출은 그 무엇도 결정하지 않은 미결정적인 준비 과정을 결과물까지 이어가고자 하지만 단원들은 공연이 코앞인데도 배역, 대사조차 확정되지 않아 불안하고 힘들어 한다.     


  연극 〈우리〉가 그려낸 난맥상에는 이 공연을 연출한 극단 ‘고래’의 고민이 담겨 있는 듯 보인다. 실제로 이 연극은 극단 ‘고래’의 상임연출인 이해성과 성폭력반대연극인행동 대표이자 연출가인 홍예원의 공동 연출/창작 작품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자기 성찰적 요소가 깃든 메타 연극이다. 그리고 여기에 남성 기득권과 이에 문제를 제기하는 페미니스트의 갈등, 이를 새로운 시도로 돌파해보려는 방법론적 시도가 더해진다. 〈우리〉를 둘러싼 이러한 중층적 맥락은 관객을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게 한다. 서로를 이해해보려는 시도, 소통을 바탕으로 다음 단계로 나아가 보자는 시도는 극심한 갈등으로 이어져 오히려 서로를 더욱 미워하게 만들었고, 새로운 형식의 연출법은 모두에게 혼란만 안겨준 채 동력을 잃는다. 결국 관객은 현재로써는 옴짝달싹 못한 채 서로를 외면할 수밖에 없다는 냉소적인 결론을 마주하게 된다. 작위적 화해나 어설픈 공존보다는 지금의 현실과 그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실질적 정서 구조를 드러내 보인다는 것으로 〈우리〉의 결말을 독해할 수 있을 것이다.     



  관객은 각자의 위치에 따라 이 결말을 자신의 방식으로 독해할 테다. 페미니스트들의 문제 제기가 더욱 정교해지고 널리 전파됨에 따라 기존의 질서 내에서 이들을 ‘융화’하려는 시도에 고개를 젓는 사람과 이들의 목소리가 ‘과격하다’고 인식하는 사람은 각자의 방식으로 〈우리〉를 읽어낼 수밖에 없다. 〈우리〉가 창조한 연극의 세계는 관객이 살아가는 세계와 중첩된다. 빛이 입자냐 파동이냐는 탐구는 ‘관찰자’의 위치에 따라 다른 결괏값이 나온다. 그래서 우리는 ‘답’을 찾을 수 없다. 애초에 관찰자의 위치가 다르기에 두 방법론을 화해시키려는 시도도, 새로운 방식으로 돌파하려는 시도도 모두 실패하고야 말고, 우리는 답을 찾기는커녕 거대한 괴리를 다시금 마주할 수밖에 없다.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의미 있는 고민은 방향을 잃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사회상, 연극, 자아 성찰이 중첩된 〈우리〉의 시도는 관객을 더한층 머리 아프게 만든다. 우리 시대의 문제는 양자역학만큼이나 초현실적이다. 고양이가 죽은 채로 살아 있다. 누군가에게 귀엽게 보이는 고양이가 누군가에게는 피가 낭자한 채 죽어 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어지럽다.



-극단 고래에서 제공받은 티켓으로 연극을 관람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연극 〈우리〉는 대학로 연우소극장에서 11월 09일~19일까지 공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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