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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노 뒤몽, 인간의 조건을 기괴하게 비틀어 심문하다

서울아트시네마, '브루노 뒤몽 특별전'

by rew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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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아트시네마에서 개최한 브루노 뒤몽 특별전에서 〈플랑드르〉를 보고 영화가 선보이는 파괴적인 균열에 충격을 받았고, 이어 그의 영화를 연달아 관람했다. 브루노 뒤몽 영화의 인장과도 같은 황량한 배경, 푸석푸석하고 건조하며 때로는 폭력적인 섹스, 메마른 정서와 이를 바탕으로 피어나는 독특한 휴머니티는 익숙하게 상상되는 인간의 조건을 비틀어 심문한다. 그리하여 논쟁적인 인간상을 제시한다. 그의 영화에는 불쾌하지만 외면하기는 어려운 기묘한 매력이 있다.




예수의 삶(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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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한, 그러나 적확한 신성모독이자 제국주의 비판


친구의 형이 에이즈로 죽는다. 카포시 육종이 가득한 그의 몸과 죽음을 통해 프레디는 친구의 형이 동성애자임을 안다. 그러나 시골 마을에서 할 일 없이 오토바이를 타며 친구들과 몰려다니기를 일삼는 프레디는 친구의 죽은 형을 모욕하지 않고 추모한다. 프레디와 그 무리는 형을 잃은 친구의 슬픔을, 동시에 그들 자신의 친구이기도 했던 자의 죽음을 애도한다. 더불어 프레디는 새장의 새를 소중히 돌보고 아껴줄 줄 아는 남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해해서는 곤란하다. 이 영화는 편견을 거스르는 애도의 드라마 혹은 거룩한 관계성에 관한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TV에서는 먼 해외에서의 전쟁 소식이 들려온다. 프레디는 그와 동떨어진 동시에 가까운 상태다. 간질로 종종 발작을 하는 그는 언젠가 자신이 친구의 형처럼, TV 속 익명의 군인들처럼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일까. 여자친구 마리와의 섹스는 건조하고, 관점에 따라서는 폭력적으로도 보인다. 추후 〈플랑드르〉, 〈트웬티나인 팜스〉 등에서 이어질, 브루노 뒤몽의 인장과도 같은 죽음과 연계된 황량한 섹스신의 첫 등장이다.


어머니는 프레디를 보채지만, 시골 마을에는 프레디 무리가 일할 곳이 ‘없다’. 심지어 아랍계가 들어오면서 기회는 더욱 줄어들었다. 적어도 프레디 무리는 그렇게 느낀다. 결정적인 사건이 터진다. 학교에서 여학생을 성추행하는 등 한심하고 무료한 일상을 이어가던 프레디는 아랍계 청년 카테르가 여자친구 마리에게 접근하자 질투와 분노에 휩싸인다. 황량하고 메마른 공간적 배경의 풍경과 그를 닮은 프레디의 마음에 불이 붙는다. 프레디는 친구들과 함께 카테르를 응징하고, 카테르는 끝내 사망한다.


모든 폭풍의 한가운데서, 프레디는 풀밭에 눕는다. 그리고 눈물을 흘린다. 참회의 눈물이라기보다는 해명할 수 없는 자신의 현재에 대한 절망과 울분, 체념이 결합된 눈물이다. 그리고 브루노 뒤몽은 그런 프레디를 ‘예수’라 부른다. 대담한, 그러나 적확한 신성모독이자 제국주의 비판이다. 아랍인의 죽음을 대가로 인간(백인)의 실존적 허무를 일깨운다는 데서는 카뮈의 《이방인》을 비판적 계승한 영화로 볼 여지도 있다. 뫼르소는 추앙받지만, 프레디는 업신여김당한다는 게 차이라면 차이다. 그리고 여기에 영화의 메시지가 있다. 1997년 칸영화제 황금카메라상 특별 언급.




휴머니티(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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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노 뒤몽의 인간의 조건


경찰 파라옹에게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 번째는 음부가 찢긴 채 강간 살해당한 소녀 사건을 해결하는 일이다. 두 번째는 친구 조셉의 연인인 도미노를 향한 사랑이다. 내내 머뭇거리며 소극적으로 구는 인물처럼 보이는 파라옹은,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곳에서 두 문제를 해결할 무언가를 도출해내고 인간성의 가장 숭고한 부분에 도달한다.


파라옹은 도미노의 동료이자 파업 중인 시민에게는 “경찰이 되기엔 멍청하다”는 평을 받고, 상사에게서는 “일을 좀 더 열심히 해보라”는 핀잔을 듣는다. 그러나 파라옹은 똑똑하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과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문제를 풀어낸다. 파라옹은 강간 살해 사건의 범인 조셉을 검거하는 데 거의 아무것도 기여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내 죽은 소녀의 아픔에 접속하교 교감하며 윤리적 태도를 잃지 않는다. 한편, 또 다른 과제인 도미노와의 관계에서는 자신을 가지라며 옷을 벗는 도미노의 제안을 거절한다. 그에게 사랑은 일회적인 방식으로 상대의 육체를 취하는 것이 아니다. 이후 좌절한 도미노의 육체는 살해 당한 소녀의 이미지와 오버랩되는 방식으로 재현되지만, 도미노는 결국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고 파라옹에게 사과한다. 가장 인상적인 건 범죄자로 밝혀진 조셉을 대하는 파라옹의 태도다. 파라옹은 늘 조셉, 도미노와 함께 다니면서도 건달 같은 느낌의 조셉과 적당한 거리를 두는데, 그가 유력한 용의자로 검거되자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감을 거두고 무너져 흐느끼는 조셉을 달래준다. 그와 입을 맞추어 위로를 건넨다.


요컨대 브루노 뒤몽은 효율적으로 일하진 못할지라도 윤리적 연결감을 간직하는 데서, 상대를 욕망의 대상으로만 보는 것을 거부하는 사랑에서, 법적 처벌과 별개로 가장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못마땅한 인간에게도 입 맞출 수 있는 태도에서 인간성의 본질을 길어낸다. 이 영화에서, 어딘가 불연속적이고 변칙적으로 이어지는 롱테이크는 여러 인간이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문제를 병치하는 데서 생기는 긴장과 파라옹이 이를 해소하는 방식을 비일상적인 감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끔 해준다. 1999년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 여우주연상, 남우주연상.




트웬티나인 팜스(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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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의 증발과 도래하는 충격


한 남녀가 캘리포니아의 사막 마을 트웬티나인 팜스로 향한다. 이것이 전부다. 충격적인 영화의 결말을 제외한다면, 〈트웬티나인 팜스〉의 줄거리에 더 덧붙일 내용은 없다. 이 당혹스러운 로드 무비에서 두 사람은 내내 다정하게 굴다가 뜬금없이 싸우고, 격정적으로 섹스한다. 내내 그렇다. 그렇다고 대화 내용이 의미심장한 것도 아니다. 핵심이라고는 없는 시답잖은 대화와 여정 곳곳에서의 섹스의 무한 반복이다. 두 사람은 멀쩡한 도로 위도 달리지만, 잘 정돈되지 않은 흙길, 울퉁불퉁한 산길로도 자동차를 몰고 간다. 서사가 실종된 상태로 길을 잃은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정체불명의 무리가 두 사람을 덮치고 남자(다비드)를 강간한다. 다비드를 강간하는 남자는 구원을 받은 듯 환희하는 표정으로 눈물을 흘린다. 한편 남성성을 훼손당한 다비드는 자신을 달래려는 연인 카티야를 살해한다. 그녀를 칼로 찔러 죽임으로써, 즉 ‘삽입’의 행위를 함으로써 자신의 상처를 달랜다. 그러나 그 후 그 역시 나체 상태로 사막에서 발견된다. 사건 현장을 발견한 경찰은 음주 단속에 정신이 없는 또 다른 동료에게 신경질을 내며 도움을 요청한다. 강간당한 남자, 살해당한 여자, 짜증이 난 경찰. 이것이 〈트웬티나인 팜스〉가 삶의 무의미와 서사의 부재를 정돈하는 방식이다. 혼란스럽다가, 무의미에 적극적으로 동참해 두 사람의 여정을 따라가다가, 충격적인 결말로 이 동행을 박살 내는 영화의 전개에 어안이 벙벙해진다. 온갖 해석이 덧붙여지기도, 감독의 허세에 냉소하는 사람도 있는 영화라는데 내게 이 영화는 두고두고 머릿속에 간직하고 싶은 영화다. 2003년 베니스영화제 경쟁부문 상영작.




플랑드르(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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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연인의 숭고할 정도로 처참한 시작


영화에는 메마른 섹스신이 수미상관으로 배치된다. 그 두 번의 섹스 사이에는 거대한 간극이 있다. 시골에서 농장 일을 하는 앙드레는 종종 바르브와 성적인 관계를 갖는다. 하지만 그녀를 연인이라 생하지는 않는다. 아직은 수줍고 확신이 없는 듯하다. 그러자 바르브는 바로 다른 남자 모르닥에게 향해 섹스한다. 앙드레는 속이 상하지만 티 내지 않고, 모르닥과 함께 군에 지원하여 먼 나라에서 진행되는 전쟁터로 떠난다.


이후 바르브는 ‘창녀’가 된다. 많은 남자가 그녀에게 욕구를 푼다. 이 와중에 그녀는 자신이 모르닥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고 이를 편지에 적어 보낸다. 동시에 임신 중지를 모색한다. 바르브의 아버지는 결국 그녀를 정신병원에 보낸다. 바르브의 어머니도 비슷한 이유로 정신병원에 보내졌음이 암시된다. 한편 앙드레와 모르닥은 전쟁에서 하나둘 전우를 잃고 점점 거칠어진다. 군인이 아니었다면 미워할 이유가 없는 다른 피부색의 남자들을 사살하고, 한 여성을 강간한다(전시 강간에 참여하지 않은 병사는 ‘호모’ 취급 당한다). 모든 부대원을 잃은 두 사람은 적군에 체포되어 죽을 위기에 빠지나 간신히 탈출하고, 탈출 과정에서 모르닥은 죽는다. 영화는 건조한 관찰자의 시선으로 바르브와 앙드레가 거친 이 폭력적인 시간들을 교차한다.


극한의 폭력에 노출된 두 사람은 다시 만나 이전처럼 몸을 섞는다. 그러나 갑자기 바르브가 앙드레를 비난하고 나선다. 자신이 모르닥의 아이를 가졌다는 이유로 질투해 혼자만 살아 돌아왔다는 것이다. 앙드레는 눈물 흘리며 그녀의 비난을 수용한다. 그리고 마침내 수치심과 메마른 감정을 걷어내고 두 사람은 포옹한다. 각각 임신과 임신 중지, 창녀라는 낙인, 정신병원 감금, 그리고 전쟁터의 살육과 공포라는 젠더화된 죽음의 경험을 거쳐 육체적 관계를 뛰어넘는 사랑의 지점에 도달하는 것이다. 멍하니 누워 하늘만 바라보는 바르브와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고개를 박고 허리만 움직여대는 앙드레의 섹스신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내내 건조한 화면 질감과 감정의 끝에 두 사람이 흘리는 눈물은 마침내 거대한 폭력을 걷어내고 두 사람을 접착하게 만들어줄 수 있을까? 2006년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 수상작.




하데비치(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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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잡부의 얼굴에 깃든 신성


하데비치(셀린)는 규율을 무시하고 순종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수녀원에서 쫓겨난다. 그러나 그녀가 신실하지 않은 건 아니다. 셀린은 부잣집 딸이고 아버지는 장관이지만 그런 아버지를 ‘병신’이라 부르며 종교적 구원을 진지하게 갈구한다. 그러던 중 아랍계 청년 야신을 만난다. 그리고 야신의 형 나시르도 만난다. 나시르는 셀린처럼 종교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청년이다. 그러나 폭력, 군대, 순교의 맥락에서 주로 그러하다. 신앙에 대한 나시르와의 대화에서 무언가를 느낀 셀린은 이슬람 국가가 공습당하는 현장을 보고 결심을 굳히고, 극단적 이슬람 단체의 지하철 테러에 가담한다.


한편 감옥을 들락거리는 잡부 남성이 있다. 그는 영화 내내 셀린, 야신, 나시르 서사의 바깥에 있지만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개입해 셀린의 ‘구원’을 완성한다. 셀린은 테러 이후 생존한 듯 보이고 여전히 공허한 듯 보인다. 그래서 어느 작은 호숫가에 투신해 생을 마감하려 한다. 그러나 이 잡부가 손을 내민다. 셀린이 수녀원과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에서 구하지 못한 구원을 아무 세력도, 사상적 체계도, 사회적 권위도 없는 한 잡부가 선사하는 것이다. 브루노 뒤몽은 〈예수의 삶〉에서 뒤틀리고 왜곡된 우리 시대의 예수의 모습을 드러내 보인 바 있는데, 이 영화에서 이러한 문제의식은 더한층 논쟁적이고(이슬람 재현의 측면) 희망적(〈예수의 삶〉과 달리 구원의 구체적 가능성을 선보인 측면)으로 변주된다. 엔딩신에서, 단 몇 장면에만 짧게 등장한 무던한 잡부의 얼굴에 신성이 깃드는 경이의 충격은 쉬이 사라질 것 같지 않다. 2009년 ‘카이에 뒤 시네마’ 베스트 10.




까미유 끌로델(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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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 좌절, 고립에 갈망이 더해진 줄리엣 비노쉬의 얼굴


연인이자 스승 로댕과 헤어진 후 정신적 어려움을 겪어 가족에 의해 정신병원에 보내져 평생을 보낸 조각가 까미유 끌로델. 영화는 끌로델이 정신병원에서 보낸 편지와 진료 기록을 조합해 그녀가 그곳에서 보낸 일상과 느꼈을 법한 감정을 풀어낸다. 천재성을 가졌으나 여자라는 이유로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예술가들이 마주한 비극의 전형성을 담아내는 데 성공한 작품이다(그러나 바로 이 이유로 브루노 뒤몽의 작품 같다는 느낌은 덜하다). 로댕에게 뮤즈로 (반자발적으로) 착취당한 끌로델은 로댕과 헤어진 후에도 그의 실질적, 정서적 흔적을 지워내지 못한다. 끌로델을 정신병원에서 나올 수 있게끔 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인 동생 폴에게 애원하다 거절당하는 장면에서, 바스트 숏으로 시작해 얼굴 클로즈업으로 이어지는 절망, 좌절, 고립에 예술에 대한 갈망이 더해진 끌로델의 다층적 감정은 줄리엣 비노쉬의 얼굴에서 인상적으로 피어난다. 불쾌하면서도 압도적인 권위를 뿜는 폴은 자기 확신에 빠진 오만한 종교인으로 종교적 권위에 기대 정신병원의 남성 의사와 공모하여 끝내 끌로델을 정신병원에 방치한다. 여성 예술가들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한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2013년 베를린영화제 경쟁부문 상영작.




슬랙 베이: 바닷가 마을의 비밀(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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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히지 않을 독특한, 계급에 관한 블랙코미디


브루노 뒤몽의 다른 영화들과는 달리 밝고 화려한 색감과 의도적으로 과장된 풍자가 야기하는 웃음이 야기하는 기괴한 밝음으로 가득 찬 독특한 블랙코미디. 1910년 여름, 북프랑스 해안가의 한 작은 마을 슬랙 베이에 귀족 취향을 지닌 부자들이 별장으로 휴가를 온다. 그런데 이곳에서 연쇄 실종 사건이 발생한다. 범인은 어업과 병행해 휴양하러 온 부자들에게 길을 안내하는 일을 하는 가난한 노동계급 가족이다. 식인을 하는 이들에게 편안한 마음으로 기꺼이 모험하기를 즐기는 부자들은 너무도 편리한 사냥감이다. 한편,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형사들이 슬랙 베이에 온다.


이 영화에서 부자들은 과장되고 경박스럽다. 자신들의 휴양지(노동계급의 삶의 터전)에서 일하는 노동계급 빈민을 미적으로 대상화하며 ‘아름다움’을 발굴하는 위선자들이다. 내내 노동계급에게 기생하고 때로는 그들 덕분에 목숨을 연명하면서도 결코 노동계급과는 섞이지 않겠다는 듯 무시한다. 더불어 그들은 모두 제각각의 이유로 모자란데, 그들 주변을 쉬지 않고 맴도는 파리는 그들의 무언가가 분명하게 ‘썩었다’는 점을 증명한다. 부자들도 자신들의 형편을 알고 있는 듯하지만 가식으로 덮으면 그뿐이라는 태도다. 다른 한편, 형사들은 지극히 무능하다. 극단적으로 뚱뚱한 남자와 작고 왜소한 남자가 한 팀을 이룬 이들 형사는 내내 헛발질만 반복한다. 체형 때문에 넘어졌을 때 자기 혼자 일어서지도 못하는 사람이 사건을 해결할 리는 만무하다. 그러나 동시에, 그 뚱뚱한 형사는 극단적 가벼움으로도 자신의 무능을 증명한다. 영화의 마지막, 풍선이 되어 하늘을 날아다니는 그는 자신의 물리적 질감과 대비되는 무능의 표지 그 자체다. 겉만 번지르르한 부자, 그들의 무능한 하수인 경찰, 앞에서는 모욕당하면서도 뒤로는 그들을 사냥해 배고픔을 달래는 노동계급. 알 수 없는 두려움과 적대감, 권력 관계가 복잡하게 맞물리는 톱니바퀴에서 슬랙 베이의 세 계급은 결코 그 누구도 완전히 이길 수 없는 생존 게임을 이어가는 중이다.


영화는 두 계급이 접속할 가능성을 모색해보기도 한다. 노동계급의 마루트와 부자 집안의 빌리 사이의 로맨스를 통해서다. 그러나 근친상간으로 태어난 빌리는 끊임없이 성별을 오인당하며(크로스드레서? 인터섹스?), 마침내는 자신을 동성애자로 ‘모욕’했다는 데 화가 난 마루트에게 구타당한다. 그리하여 두 계급은 끝내 서로에게 접속하지 못하고 은근히 두려워하거나 경멸하는, 혹은 미학적으로 타자화하거나 열등감을 안겨주는 관계로만 남는다. 상징과 이미지의 범람에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웃음과 살기가 한데 엮여 기묘한 인상을 남겨 쉽게 잊히지 않을 블랙 코미디 영화다. 2016년 칸영화제 경쟁부문 상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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