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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서울독립영화제 스케치] 영화라는 무한대

제50회 서울독립영화제

by rew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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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이

황슬기 감독/2024/Fiction/86min/‘장편 쇼케이스’ 섹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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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에 갇혀 있더라도, 절망적 현실을 조감할 수 있다면 우리는 웃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장선 배우가 치매 노인인 어머니를 돌보는 딸을 연기한 영화 〈겨울나기〉에서, 영화는 딸이 집에서 모시던 어머니를 요양원에 보내며 마무리된다. 〈홍이〉는 반대다. 홍이는 어머니를 요양원에서 데리고 나와 자기 집에 모신다. 경제적 이유 때문이다. 선생님을 꿈꾸지만 학원에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는 홍이는 엄마 통장의 돈이 필요하다. 모녀는 닮은 듯 다르다. 다르면서도 같다. 매번 상처 주는 말을 주고받으며 부딪칠 때는 두 사람의 다름이, ‘네 잘못 없고, 내 잘못도 아니지만’ 이제는 나갈 복조차 없는 팔자를 공유한다는 데서는 두 사람의 같음이 도드라진다.


영화의 세 주요 인물은 모두 부정적인 결말을 마주한다. 자신이 번듯한 삶을 살고 있는 척하는 홍이가 호감 있는 남자에게 비루한 현실을 드러내자, 남자는 그녀를 떠난다. 어머니는 다시 요양원으로 들어간다. 홍이와 함께 어머니를 돌봐주던 어머니의 옛 친구는 무보수 돌봄 노동에 대한 오해와 갈등으로 모녀를 떠난다. 요컨대, 모녀의 현실은 더한층 엉망이 되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영화는 오묘한 희망의 정서를 드러낸다. 누구보다 가깝지만 아득할 정도로 먼, 결코 서로를 떨쳐낼 수 없는 모녀 관계를 파고들어간 후에 자신들이 어떤 미로에 갇혔는지를 알게 된 후의 희망일 것이다. 미로에 갇혀 있더라도, 절망적 현실을 조감할 수 있다면 우리는 웃을 수 있다.




3학년 2학기

이란희 감독/2024/Fiction/105min/‘장편 경쟁’ 섹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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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소희〉에 이은, 우리 사회의 필람작


실화를 모티브로 한 영화 〈다음 소희〉를 본 우리는, 같은 소재의 영화 〈3학년 2학기〉를 보며 내내 마음을 졸일 수밖에 없다. 직업계 고등학교를 다니는 창우는 졸업을 앞두고 있다. 학교 선생님의 소개로 몇몇 공장에서 면접을 보고 친구와 함께 인턴으로 일하기 시작한다. 공장에는 친절히 알려주는 사수도, 다치지 않게 노동자를 보호할 안전장치도 없다. 효율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는, 값싼 노동력으로 급하거나 귀찮은 일을 땜질하는 공장이라는 세계는 이제 성인이 될 창우에게 그리 녹록치 않다. “저를 좋게 봐줄까요?” 창우는 공장에서 인정받아 병역특례와 대학 지원 혜택을 받고 싶다. 그러나 ‘폐급’과 ‘에이스’를 순식간에 구별하는 공장에서 창우는 자꾸만 기가 죽는다.


창우와 함께 공장에 간 친구는 금세 공장의 ‘질서’에 질려 때려치우고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군대에 간다. 창우가 원하는 미래를 모두 성취한 ‘레전드’ 선배는 산재로 사망한다. ‘에이스’로 인정받았으나 부당한 노동 현실을 고발한 창우 또래의 공장 노동자는 바른 소리를 했다는 이유로 공장을 떠난다. 안전장치 없이 일하던 창우는 깁스를 해야 할 정도의 부상을 입는다.


영화에는 창우가 수능 소식으로 떠들썩한 TV 화면을 보는 장면이 두어 번 나온다. 왜 누구의 미래는 축복받는데, 누구의 미래는 아무런 관심을 받지 못할까? 같은 사회에 속한 같은 나이인데 이들 사이에는 왜 이렇게 커다란 차이가 존재할까? 불안한 현실과 해결하지 못한 질문들 속에서, 창우는 조금씩 성장한다. 내내 마음속으로 창우가 죽지 않길 바라며 영화를 봤고, 영화가 끝나고 나서야 몸의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창우는 죽지 않고 성장한다.


〈괜찮아, 앨리스〉, 〈잠자리 구하기〉, 〈아메바 소녀들과 학교괴담: 개교기념일〉은 학교와 수능이라는 미래에 억눌린 학생들의 현실을 고발하거나 나름의 방식으로 돌파한다. 그러나 〈3학년 2학기〉는 이들이 짚지 못한 또 다른 학생들의 미래를, 그들이 발 디디고 있는 현실에서부터 촘촘하게 쌓아올린다. 〈다음 소희〉에 이은, 우리 사회의 필람작이다.




1980 사북

박봉남 감독/2024/Documentary/124min/‘장편 쇼케이스’ 섹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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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한 질문이 묵직하게 마음을 울리는


2004년 폐광된, 손꼽히는 민영 탄광이었던 강원도 정선군 사북의 동원탄좌. 그러나 영광만이 존재하는 건 아니었다. 70년대 사북은 매년 탄광 노동자 200여 명이 사망했고, 사실상 국영으로 운영되던 탄광은 노동자 처우 개선에 큰 관심이 없었다. 노조 간부는 사측을 대리하는 일이 많았다. 그러던 중 마침내 ‘그 사건’이 터졌다. 노조 간부가 회사와 임금 협잡을 했다는 정황을 포착한 노조원들이 폭발했고, 회사에 상주하던 정보 경찰과 충돌이 있었다. 순식간에 광부 3천여 명이 이 소요에 가담했고, 이 과정에서 경찰이 사망하기도 했다. 사건은 순식간에 눈덩이처럼 커졌다. 정부는 공수부대 투입을 고민했다. 한 달 후, 광주에 투입된 그 공수부대였다. 천만다행으로 협상이 타결되었고, 사북은 일상을 되찾는 듯 보였다.


그러나 추후 꾸려진 합동수사본부는 집요하게 노동자들을 공격했다. 엄청난 규모의 고문이 자행되었다. 그 ‘배후’를 색출하기 위해서였다. 결국 주동자로 지목당한 사람들은 기소되었고, 처벌되었다. 2002년 피해자 증언이 시작된 이후 재심에서 무죄를 받는 사례가 조금씩 쌓이고 있지만 그중 상당수가 이미 너무 노쇠했거나 세상을 떠난 뒤였다.


그러나 영화는 1980년 사북에서 있었던 일을 ‘항쟁’이라 부르지 않는다. ‘사건’이라 부른다. 국가와 자본의 입장에서 칭하는 말인 ‘사태’와는 분명히 거리를 두지만 노동 쟁의로서의 적극적 의미 부여에는 거리를 두는 것이다. 그 이유는 한 장의 사진에서 출발한다. 당시 성난 노동자들은 임금 협잡에 가담한 노조 간부의 아내를 납치했고 며칠간 그녀를 감금했다. 폭력도 있었다고 추정된다. 1980년 사북에서의 사건은 그녀가 손이 묶인 채 노조원들에게 둘러싸인 한 장의 사진으로 대중에게 기억된다. 그녀와 그녀의 아들들은 아직도 그 상처 속에서 산다. 마찬가지로 탄광 광부의 아들이었던 순경들이 다치고 죽었다는 이유도 있다. 지금도 노조 간부 가족과 쟁의에 참석한 탄광 노동자들은 현격한 입장 차를 보이고 있다.


그러니까, 1980년 사북을 ‘사건’이라 명명하는 영화의 물음은 이렇다. 서로 다른 입장의 피해자들이 대립하는 동안 진짜 책임자인 국가와 자본은 멀찍이 떨어져 관망하고 있다는 것. 피해와 가해, 기억과 정의의 문제가 복잡하게 얽힌 1980년 사북은 명징한 판단을 넘어선 화해와 미래의 문제를 고민케 한다. 복잡한 질문이 묵직하게 마음을 울리는,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영화다.




일과 날

박민수, 안건형 감독/2024/Documentary/84min/‘장편 경쟁’ 섹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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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 노동의 짝꿍, 불안


마네킹 제작자, 염전 노동자, 학원 사무직, 프리랜서 PD, 재활용 플라스틱 선별 노동자, 백반집 사장, 양조장 종사자, 돌봄 노동자 엄마, 전파사 사장……. 영화는 다양한 노동자의 노동 현장을 조용히 비춘다. TV와 라디오에서는 AI로 인간 노동이 대체될 거라는, 기후 위기가 가속화되고 있다는, 인구 위기가 심각해진다는 뉴스가 계속 들려온다. 서로 다른 세대와 성별, 업종의 노동자들은 거대한 위기 담론에 둘러 쌓인 채 불안을 달래가며 자기 일을 하고 있다.


이들에게 불안을 안기는 건 거대 위기 담론뿐이 아니다. 늘 변화와 혁신, 자기 계발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의 문화 논리 역시 같은 일을 반복적으로 수행하는 노동자들의 마음에 불안의 형태로 스며든다. 자기 일로 ‘당당하게 살고 싶다’는 노동자들의 바람이 조금씩 위태로워진다.


영화의 마지막, 〈일과 날〉은 리처드 세넷의 《신자유주의와 인간성의 파괴》를 참고했다고 밝힌다. 신자유주의가 서로 다른 세대의 노동계급에게 어떠한 상흔을 남겼는지를 탐구한 이 책에서, 세넷은 억압적이나 비교적 안정적 노동 서사를 가질 수 있었던 기성 세대와 그러기 어려운 그들의 자녀 세대를 구별한다. 이 영화에서도 그렇다. 영화에서 비교적 안정적 노동 서사를 가지고 자부심을 갖는 사람은 전파사를 운영하는 노인뿐인 듯싶다. 그 아래 세대는 대개 불안에 시달린다. 성별과 업종의 차이보다도 세대의 차이가 가장 두드러지는 것이다. 영화는 상처받은 노동자들의 내면을 위무하고, 그들 일을 예찬함으로써 이 문제적 흐름을 비판적으로 되돌아보자고 제안한다.




바로 지금 여기

남태제, 문정현, 김진열 감독/2024/Documentary/94min/‘장편 쇼케이스’ 섹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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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예한 고발보다는 포개짐의 지점에 천착하다


영화는 청년기후긴급행동 활동가들이 대기업 두산의 사옥에서 시위를 벌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베트남에 석탄 화력 발전소를 건설하는 두산에 항의하기 위한 시위다. 그러나 이들은 두산에 고발당한다. 사옥 앞 구조물에 래커칠을 한 것은 재물 손괴, 시위 내용은 구성원에게 충격을 줬다는 이유다. 최종적으로 이들이 무죄 취지의 파기환송을 받아내긴 하지만, 그전까지는 큰 벌금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이 판결은 현재의 법체계에서 기후위기의 긴급성을 알리기 위한 ‘준법 투쟁’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분명하게 알려준다.


그러나 카메라는 이들만을 비추지 않는다. 동의동 쪽방촌과 여성 농부에게로도 나아간다. 가난한 사람과 여성 농부(대형 농기구가 아닌 몸으로 땅과 만나는 농부)는 기후위기에 가장 민감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세 현장을 교차하면서, 영화는 기후위기를 첨예하게 고발하기보다는 서로 다른 영역의 삶이 어떻게 공통의 주제로 포개지는지를 살핀다. 짜임새와 구성의 측면에서 아쉬운 점도 있지만 이 연결성을 환기하는 것만으로 적당한 문제제기를 하는 영화다.




구제역에서 살아 돌아온 돼지

허범욱 감독/2024/Animation/105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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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다른 두 존재가 겪는 폭력의 충격적인 교차


절박한 두 존재가 있다. 하나는 구제역에서 살아 돌아온 돼지다. 다른 하나는 군인 최정석이다. 돼지는 집단 폐사라는 폭력에서 살아남았고, 정석은 군대에서 극단적 가혹행위에 시달린 끝에 선임을 죽이고 부대를 탈출한다. 돼지는 인간이 되면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석은 차라리 짐승이 되면 삶이 편안해질까 싶다. 그러던 중 가까스로 탈출한 돼지가 자살한 농장주의 다리를 물어뜯고, 바이러스에 감염된다. 그리고 우연한 계기로 정석도 돼지의 바이러스에 감염된다. 그리고 두 존재의 꿈이 조금씩 실현된다.


도입부의 몰입감과 날카로움은 정말로 강렬하다. 두 존재가 겪는 폭력이 교차하며 이들이 맞닥뜨린 운명을 어떻게 헤쳐 나갈지를 궁금케 한다. 그러나 도입부 이후, 영화는 거대한 폭력이 두 존재에게 남긴 내면의 상흔, 그리고 이들이 그 상흔으로 인해 어떤 혼란을 겪으며 갈등을 마주하는지로 방향을 튼다. 그러니까, 폭력 그 자체에 대한 고찰보다는 그 폭력으로 인한 뒤틀린 욕망의 발현에 천착하는 것이다. 나는 차라리 도입부의 문제의식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게 어떨까 싶었다. 다른 선택을 함으로써 서사의 동력이 약해지는 듯한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로 다른 두 존재가 겪는 폭력을 교차시키는 강렬한 도입부가 남긴 강렬한 인상만으로도, 이 영화는 충분히 문제작이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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