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28년 후〉
2003년 처음 시작된 이 시리즈를 열어젖힌 건 ‘막무가내 동물권 활동가’들이었다. 분노 바이러스로 실험 중인 침팬지를 풀어주어, 영국 전역의 인간에게까지 그 바이러스를 퍼트린 ‘원흉’으로서 말이다. 1편인 〈28일 후〉에서 주인공 짐은 병원에 입원해 있다 뒤늦게 바이러스로 인한 괴멸을 마주하고, 아직 감염되지 않은 몇몇 인간을 만나 라디오 방송이 안내하는 군인들의 음성을 따라 그들의 근거지로 향한다. 이 영화가 웰메이드 좀비 영화의 클래식함을 다 갖추고 있다는 세간의 평가는 주인공 무리가 군 기지에 도착한 이후 본격화된다. 장르물의 쾌감에 더해, 역시 제일 무서운 건 인간이라는 점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그렇다. 군인들이 민간인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이성애적 성욕을 해소하기 위해 사람들을 유인하고 비윤리적인 좀비 실험을 자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짐과 친구들은 좀비뿐만 아니라 군인들과도 싸워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한다. 부대 대장은 남성 군인 십여 명만으로 여자도 없이 무얼 할 수 있겠냐며 ‘여자는 미래’라고 말한다. 동성애를 상상 가능한 미래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이 애석했다. 그런 그들이 맞이하는 종말의 이유가, 여성이라는 성욕 해소의 대상이자 ‘미래’를 상징하는 기표가 없어서가 아니라는 점은 좋았다. 이들은 생물학적 재생산을 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문제적 욕망에서 기인한 파멸을 맞이한다. 그리고 보란 듯이, 동료 여성을 군인들의 먹잇감으로 던져주고 타협하기를 거부한 짐이 (이성애적) 대안 가족을 마련하며 끝나는 점도 재미있다. 마치 그것이 ‘보상’이기라도 하다는 듯이.
애석하게도, 대니 보일이 아닌 후안 카를로스 프레스나딜로가 연출한 〈28주 후〉(2007)는 스케일만 커진 채 전작의 장점을 계승하지 못한 영화의 전형과도 같다. 바이러스는 ‘박멸’되었지만 영국은 여전히 봉쇄 상태고, 미군이 출입국을 엄격히 관리하며 미감염자만이 영국에 입국할 수 있다. 그런데 통제 구역을 벗어난 어린아이들의 일탈로 다시금 바이러스가 창궐하고 비감염자와 감염자를 구분할 여유가 없는 미군은 일괄 박멸의 방법을 택한다. 그리고 그 명령에 불복종해 아이들을 지키려는 몇몇 군인들이 있다. 이 영화가 가장 크게 미끄러지는 지점은 중요한 사건이 새로이 전개될 때마다 어느 이성애 핵가족의 개인적 동기에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관객은 계속 생각할 수밖에 없다. 저 엄중한 통제 상황에, 저렇게 쉽게 일탈이 발생한다고? 그것도 매번? 이 영화는 ‘자연 항체’의 소재를 기입해 작위적 전개의 구멍을 메우려 하지만, 힘이 많이 달린다.
그러나 어쩌면 속편의 실패는 대니 보일이 다시 〈28년 후〉를 만드는 계기가 되어주었을지도 모른다. 첫 바이러스 창궐 이후 28년. 영국의 어느 섬마을에서는 소년 스파이크가 아버지를 따른 첫 사냥을 앞두고 있다. 썰물 때 육지와 섬이 연결되는 시간, 섬 밖으로 나가 필요한 물자를 구하고 좀비를 사살하는 일이다.
스파이크는 아버지와 함께 첫 사냥을 성공적으로 마친다. 카리스마 있는 남성 영웅인 아버지는 마을 사람들 앞에서 거짓을 보태 스파이크를 한껏 띄운다(아버지 역에 애런 존슨을 캐스팅한 건 정말 좋은 선택이었다. 추후 이어지는 시리즈에서도 그가 중요한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 그러나 스파이크는 아버지의 거짓말이 불편하다. 더불어, 아버지가 아픈 어머니를 버리려는 듯한 느낌, 어머니에게 도움이 되는 비밀을 감추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는 점도 걸린다.
결국 아버지가 감춘 비밀을 알아채고, 아픈 어머니와 마을에서 탈출해 의사에게 향하는 스파이크. 스파이크는 이 과정에서 어머니를 잃지만, 아버지와는 다른 남성성을 조우한다. 의사인 닥터 켈슨은 거짓으로 영웅담을 자가 발전하는 아버지와 달리 수십 년간 외로움 속에서도 윤리를 다해 좀비와 인간을 위한 죽음의 의례를 지켜왔다. 스파이크는 갈림길에 선다. 거짓되고 폭력적이지만 영광을 약속하는 아버지의 세계로 들어설 것인가, 숭고하지만 외로운 닥터 켈슨의 세계로 나아갈 것인가.
‘당연히’ 후자다. 그는 홀로 세상 밖으로 떠난다. 영화는 스파이크의 모험이 계속될 것을 암시하며 마무리되는데, 장르물의 재미를 꽤 넉넉하게 챙기는 연출(극장의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종종 서늘하게 느껴졌다)뿐 아니라 ‘남자아이를 어떻게 기를 것인가’라는 당대의 문제를 담아냈다는 점에서도 높이 평가할 만한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