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파솔리니의 소설《폭력적인 삶》을 읽고, 그의 영화가 너무도 보고 싶었는데 이번 기회에 5편을 관람했다. 또 다른 기회에 관람했던 감독의 영화 〈오이디푸스 왕〉을 포함해 지금까지 본 그의 영화는 총 6편. 남은 영화도 차차 기회가 있길 바라며...
한때 성노동자로 일했으나 지금은 로마에서 노점상을 운영하는 맘마 로마에게는 꿈이 있다. 아들 에토레가 로마의 번듯한 구성원이 되는 것이다. 맘마 로마는 헌신적으로 아들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더 좋은 곳으로 이사를 앞둔 맘마 로마에게 과거 포주였던 남자가 찾아와 돈을 요구한다. 돈을 주지 않으면 아들에게 과거를 폭로하겠다고 협박한다. 하지만 맘마 로마는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강인한 의지와 탁월한 생활력으로 위기를 조금식 헤쳐 나간다. 그녀는 아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폭력적인 음모도 불사한다.
그러나 에토레는 어머니의 뜻을 따르는 듯하면서도 자꾸만 어긋난다. 어머니가 점찍은 상류층의 자제가 아닌 동네 불량배 모두와 관계를 맺는 여성에게 이끌리고, 그녀에게 선물하기 위해 어머니의 물건을 몰래 팔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에토레는 어머니가 그의 미래 모습으로 바라는 ‘신사’라는 말이 우습기만 하다. 에토레에게는 자신의 미래에 대한 어머니의 헌신과 믿음이 어딘가 우습고 시시해 보이는 듯하다.
그러던 어느 날 에토레는 모두가 ‘공유’하던 여성을 독점하려 했다는 이유로 친구들에게 구타당한다. 어머니의 비밀도 알게 된다. 비뚤어진 에토레는 결국 희미한 열병을 앓은 채로 물건을 훔치다 발각되어 구속되기에 이른다. 이후 감옥에서 에토레의 열병은 점점 더 심해지고 정신 이상 증세까지 찾아온다. 침대에 구속된 채 독방에 수감되는 에토레에게 어머니가 꿈꾼 ‘신사’의 미래는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희미해지는 에토레 눈빛의 초점은 그가 열병에 시달리다 사망했을 거라 짐작케 하는데, 소식을 들은 맘마 로마는 깊은 슬픔의 눈물을 흘린다.
파솔리니는 68혁명 당시 부르주아 집안의 대학생 시위대보다 가난한 집안 출신 경찰을 지지한다고 밝혀 큰 논란을 빚은 바 있다. 공산당원이었던 파솔리니는 당이 도시에서 ‘노동자’가 되지 못한, 도시의 비공식 부문으로만 여겨지는 룸펜 프롤레타리아가 이탈리아 공산당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촉구해 당과 갈등을 빚은 적도 있다. 이렇게 본다면, 〈맘마 로마〉는 도시에 안착하지 못하고 룸펜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을 위한 파솔리니의 애가라고 할 만하다. 그리고 에토레의 열병은 룸펜의 도시 생활, 도시인이 되라는 불가능한 요구, 상승하고 싶은 남성성의 욕망이 그의 몸속에서 충돌하고 갈등하다 터져버린 결과일 것이다. 도시 룸펜의 비참한 말로를 보여주는 이 영화가 오히려 룸펜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파솔리니의 깊은 애정을 엿볼 수 있는 영화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1962년 베니스영화제 경쟁 부문 상영작.
1963년 처음 제작된 이 영화의 1부는 공산당원인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가, 2부는 극우파인 조반니 구아레스키가 각각 맡았다. 사진, 영상 등의 자료를 활용해 당대의 주요 사건을 기록하는 뉴스 필름, 혹은 뉴스 릴 장르의 영화였다. 파솔리니는 구아레스키와 함께 작업하는 데 큰 반감이 있었지만 결국 수용했다고 한다. 그리고 2008년, 주세페 베르톨루치가 1부의 삭제된 장면을 재구성해 이 영화를 다시 내놓았다.
파시스트 군대에 동원된 군인을 향한 추모와 그들을 동원한 권력자 비판, 한국전쟁, 자연재해, 식민지와 그곳의 유색인 등 전쟁과 고통, 파괴의 이미지가 죽 이어진다. 더불어 축재와 일상적 뉴스, 당대의 혼란과 열기, 도시 생활 등 민중적 삶의 모습도 담겨 있다. 한 시대의 거장이 자신이 사는 시대의 환희와 열망, 좌절의 순간을 담아낸 영화의 기록인 셈이다.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의 1964년 영화. 노동자가 아닌 룸펜을 옹호한 공산주의자이자 늘 추문이 뒤따르던 동성애자였던 그가 〈마태복음〉에 기초해 예수의 삶을 재현했다는 점에서, 나는 이 영화에 어떠한 형태의 ‘파격’과 ‘위반’이 들어 있으리라 추측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파솔리니는 예수의 일대기를 충실하고 진중하게 그려낸다. 아마 한동안은 이 영화에서 예수를 연기한 엔리케 이라조퀴의 얼굴만이 예수의 얼굴로 상상될 것만 같을 정도로. 이 영화가 내 기대를 ‘배반’하는 이유는 뭘까. 어쩌면 담론과 현실의 바깥으로 내몰린 자들을 사유와 실천의 중심에 들여오려던 파솔리니의 삶이야말로 ‘진짜’ 예수의 삶과 닮았기 때문이지는 않을까. 1964년 베니스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 수상작.
이 불친절한 영화에서, 파솔리니는 두 개의 시대를 병렬적으로 배치한다. 먼저 정확한 시대를 가늠하기 어려운 옛날. 한 남자가 황량한 화산 지대를 떠돌며 곤충과 뱀을 잡아먹다가, 나중에는 사람까지 잡아먹는다. 그리고 자그마한 식인 집단을 이룬다. 그러나 남자와 그 무리는 결국 마을 사람들에게 붙잡히고, 그들은 산 채로 기둥에 묶여 들짐승에게 잡아먹히는 벌을 받는다. 포박당하기 직전, 최초의 식인하는 남자는 이렇게 반복해서 말한다. “나는 아버지를 죽이고, 인육을 먹었으며, 환희로 몸을 떨었다.”
또 다른 이야기는 68혁명을 한 해 앞둔 전후 독일의 부유한 부르주아의 집안이 배경이다. 첫 번째 이야기가 남자의 마지막 대사 말고는 아무 말도 없는 침묵으로 채워진 반면, 두 번째 이야기는 의미값이 없는 전형적인 부르주아 공상 담론의 향연으로 꽉 차 있다. 이 집안의 아들 율리앙은 모든 것을 회피하고 결정하기를 미루는데, 이야기의 마지막에는 그가 돼지와 종종 들러붙었다는 점과 그러다가 끝내 돼지 무리에게 잡아먹혔다는 것이 드러난다. 율리앙의 아버지는 나치 출신의 사업가와 협업하다 이 소식을 듣는다.
두 세계 사이의 직접적인 연결점이 있다. 동성애자였던 파솔리니의 연인 배우 니네토 다볼리다. 그는 두 세계 모두에서 조연으로 등장하는데, 첫 번째에서는 식인하는 남자가 처벌받는 현장의 목격자로, 두 번째에서는 율리앙의 아버지에게 그가 돼지에게 잡아먹혔음을 전하는 인물로 나온다.
이 영화가 자본주의적 소비와 피시즘의 유비 관계를 드러낸다는 평가 많다. 나치의 죄악을 청산하지 못하고 여전히 떵떵거리는 사람들과 그들의 우유부단한 후손이 돼지(‘유대인’) 위에 군림하면서도 들러붙는 것을 식인에 빗대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첫 번째 이야기에서 식인하는 남자가 죽기 직전에 내뱉는 말이 자못 숭고해 보이기까지 하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더 많은 해석에 열려 있을 것만 같다. 불친절한 이미지와 서사의 병렬이 묘하게 머릿속에 남아 여운을 남긴다.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가 동명의 사드의 원작을 영화화한 작품. 파시즘이 득세하던 때의 이탈리아에서 장관, 총장 등 네 명의 힘 있는 남성이 협의 끝에 하나의 법안을 제정한다. 그들이 원하는 10대 남녀 청소년들을 강제로 데려와 자신들의 성적 노리개로 활용할 수 있다는 법이다. 포주들이 나라 곳곳에서 준수한 외모의 청소년들을 징집하고, 서로의 딸과 결혼해 혼인 동맹을 이룬 네 명의 늙은 남자는 자신들의 변태 성욕을 이들에게 강압적으로 실천한다. 매일 밤, 남자들을 흥분시키기 위해 경험 많은 포주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면, 그 이야기에 맞춰 늙은 남자들은 상대를 골라 욕구를 해소한다. 피가 흥건해질 정도의 가학, 소변과 대변을 활용한 성애 충족 등 불편함과 역겨움을 유발하는 장면이 가득하다. 원작이 쾌락의 가능성을 극단으로 탐구한 것과는 달리, 이 영화는 극단 쾌락 추구를 파시즘에 빗대 파시즘의 폭력성을 고발하는 도구로만 쓴다. 결국 서서히 모두에게 번져 음울하게 젖어들게 만드는 늙은 네 남자의 폭력적 성애는 파시즘이 우리 영혼에 어떤 흔적을 남기는지를 보인다. 그러나 ‘극단적’ 쾌락이 늘 폭력의 형태로만 분출되지는 않을 수도 있다는 물음은 고려하지 않는 영화다. 1975년 테러로 사망한 감독의 마지막 연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