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타히티의 고갱〉
고갱의 삶과 예술 여정을 TV 다큐멘터리의 문법으로 담아내는 이 영화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건 고갱과 식민주의의 관계다. 고갱은 경제적으로 성공한 중개인이자 가족을 부양하는 가장이었다. 그러나 늘 삶에 답답함을 느꼈고, 이를 그림으로 표출했다. 그림에 열중한 그의 영혼은 곧장 ‘이국적인 것’으로 향했다. 그에게 이국은 ‘진정한 무언가를 아직 잃지 않은 것, 문명과는 거리가 있는 단순함’의 표상이었다. 이국에 대한 매혹은 그가 남태평양의 프랑스령 타히티로 이주하면서 본격화된다. 어린 소녀였던 현지인 아내 테하마나와 2년을 함께 보낸 후, 그녀에게 알리지도 않고 파리로 떠나면서 고갱은 편지를 한 통 남겼다. 그 편지에는 이런 문장이 있었다.
너와 보낸 2년 동안 20년은 젊어진 것 같아.
그의 예술혼이 어떻게 부풀어 올랐는지를 정확하게 대변하는 문장이다. 이국의 어린 여성과 그녀가 살아가는 세계에 대한 고갱의 매혹은 예술적 수탈과 착취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는 게 저 한 문장에서 드러난다. 프랑스로 돌아간 고갱은 자기 그림에 대한 반응이 시원치 않자 다시 타히티로 돌아와 또다시 테하마나를 불렀는데, 이번에는 그녀가 고갱을 떠났다. 한쪽 다리에 커다랗게 자리 잡은 매독의 흔적에 질색해서였다.
고갱은 파리에서도, 타히티에서도 늘 유색인 소녀를 연인으로 뒀다. 영화는 이 사실을 외면하지 않는다. 그러나 고갱을 ‘소아성애자’라 매도하는 데는 분명히 반대한다. 당시 타히티의 젊은 여성이 나이 든 백인 남성과 관계를 맺는 건 ‘관행’의 일부였고, 프랑스에서도 성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성년의 기준이 ‘14세’였다고 반박하면서다. 왜 고갱이 늘 어린 여성에게만 끌렸는지에 대한 답변으로는 충분치 않아 보인다.
하지만 오늘의 관점에서 그의 욕망을 잡도리할 생각은 없다. 오히려 문제는 그의 예술에서처럼, 식민주의다. 우리는 건강이 날로 악화되는 중이었던 고갱에게 예술가로 살아가기 위한 일상적 돌봄과 예술적 영감을 동시에 제공하는 존재로서 젊은 유색인 여성이 늘 존재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갱의 삶을 모티프로 한 서미싯 몸의 《달과 6펜스》에도 이 점이 잘 나와 있다). 고갱은 식민자였고, 그의 아내‧연인‧뮤즈는 모두 피식민자였다. 우리는 고갱의 예술을 논할 때 늘 이 점을 함께 논해야 한다. 이와 더불어, 고갱이 타히티에서 얻은 후손들이 고갱의 예술적‧경제적 유산을 전혀 상속받지 못했다는 점도 마찬가지로 식민주의의 혐의를 제기한다.
아이러니한 건, ‘고갱의 그림이 타히티와 타히티 여성의 아름다움을 포착했다’는 명제가 분명한 예술적 진실로서 존재한다는 점이다. 고갱 그림 속의 유색인 여성들은 ‘현지인 아내’ 이상의 생기와 품위를 뿜어낸다. 고갱 예술의 식민주의적 토대를 비판하더라도, 이 점 역시 외면해선 곤란하다. 더불어 고갱이 종종 식민 당국에 맞서 폴리네시아인들을 위해 목소리를 내고 함께 싸웠다는 점도 흥미롭다. 예술적 수탈과 착취가 종국에는 식민자와 피식민자의 경계를 허물어버린 것일까. 전반적으로 고갱의 삶과 예술을 상찬하는 이 영화에서, 관객은 얼마든지 샛길로 빠져나와 다른 방식으로 그의 예술을 향유할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