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파리, 밤의 여행자들〉
1980년대 파리. 심리학을 전공한 중년의 경력 단절 이혼 여성 엘리자베트는 한 심야 라디오 방송에 전화 교환원으로 취직한다. 그녀의 직장 동료에 따르면, 심야 라디오 방송은 원체 듣는 사람도 적고 경쟁 프로그램도 없기 때문에 변화 압박에 시달리지 않는다. TV의 부상으로 라디오가 쇠락하는 시대지만, 엘리자베트와 그 동료들은 빠르게 달려가는 시간을 붙잡기 위해 기를 쓰며 쫓지 않아도 된다. 방송은 진행자와 청취자가 고민을 나누는 간단한 형식이다. 낮에, 지인에게 터놓기 어려운 이야기들이 밤에 깨어 있는 소수의 사람들끼리만 공유하는 목소리가 되어 울려퍼진다. 그리고 이 영화의 모든 것은, 많은 이가 잠든 대도시 파리에서 조용한 목소리로 주고받는 이 목소리들로부터 파생한다.
이 라디오에 출연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전화로 통화를 해도 되고, 직접 스튜디오에 방문해 별도의 공간에서 얼굴을 가린 채 대화를 나눠도 된다. 탈룰라는 후자다. 엘리자베트는 탈룰라에게 계속 마음이 간다. 방송에 출연하겠다고 스튜디오에 왔으면서도 사회자의 질문에 어딘가 방어적으로 구는, 거처도 없이 떠도는 듯 보이는 어린 여성을 그대로 보내면 안 될 것만 같다. 그래서 두 자녀가 있는 집으로 탈룰라를 데려온다.
탈룰라는 밤의 유령과도 같다. 그녀는 이름을 여러 개 쓰며, 도시의 어두운 곳에서 껄렁하게 구는 친구들이 있다. 탈룰라는 엘리자베트의 호의로 두 번이나 그녀의 집에 머물지만, 두 번 모두 소리 소문 없이 조용히 사라진다. 괜한 의구심과 으스스함을 자아내면서도 자기 자취를 남기지 않는 탈룰라. 엘리자베트의 아들 마티아스는 탈룰라에게 사랑에 빠져 몇 년간이나 마음을 애태우는데, 탈룰라는 마티아스가 그 마음을 표현하자 너와 너를 둘러싼 소중한 것들을 망칠 수 없다며 떠난다. 매혹적이지만 자취를 남기지 않고, 정체를 확실히 알 수 없는 존재. 밤에 등장해 새벽이면 사라지고 없는 여자. 대도시 파리, 밤의 유령, 탈룰라.
그러나 탈룰라가 유령이라고 해서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이미 마티아스의 마음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엘리자베트에게도 마찬가지다. 엘리자베트는 ‘우리’의 범주를 탈룰라에게까지 조심스레 확장하려 한다. 엘리자베트는 탈룰라를 걱정하고 챙겨준다. 그러면서도 혹시 약물에 손을 대는 탈룰라가 안 그래도 무료하고 목적 없는 청춘기를 보내고 있는 마티아스에게 안 좋은 영향을 끼치지는 않을까 걱정한다. ‘유령’으로 살아온 탈룰라는 이 미묘한 긴장을 간파한 것 같다. 마티아스, 엘리자베트 가족을 망칠 수 없어서 떠난다는 탈룰라의 마음은 진심일 것이다. 대도시 으슥한 곳에서 유령으로 살아온 탈룰라는 자신이 엘리자베트 가족과 ‘우리’로 묶일 수 없다는 걸 근본적으로 감각한다. 대도시 유령의 체화된 감각이다.
영화는 엘리자베트 가족의 시선으로 전개된다. 탈룰라는 어느 날 나타나고, 어느 날 사라진다. 즉, 이 영화는 ‘대도시의 타자’라 불릴 만한 탈룰라를 마주한 어느 평범한 소시민 가족의 이야기다. 대도시의 유령이자 타자인 탈룰라와의 마주침은 이들에게 쉬이 정돈되지 않는 파편을 남긴다. 그 파편은 혼란과 상처를 준다. 하지만 현재의 관계를 더 단단히 다지는 토대, 엘리자베트가 탈룰라에게 손 내밀었듯 그 관계망을 확장하는 토대가 되기도 한다.
이 가족이 탈룰라가 남긴 유무형의 파편을 함부로 떨어내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에서 우리는 대도시의 윤리와 삶의 태도를 감각적으로 체화할 수 있다. ‘우리’의 범주는 쉬이 깨지지 않는다. 때로는 유령을 테두리 밖으로 몰아내는 선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선함이 깃든 손 내밀기로 ‘우리’는 유령과 접촉할 수 있다. 게다가 그 접촉은 흔적을 남긴다. 학교와 집에서 늘 구박받던 마티아스가 출판사에 투고하는 시에는, 아마도 그 접촉의 흔적이 묻어 있을 것이다. 1980년대 파리의 질감을 실감나게 재현한 이 영화에서, 도시의 유령이자 타자인 탈룰라의 관점에서 이 만남이 어떤 의미일지도 궁금해진다. 밤의 유령과 파편, 남들이 잠든 시간에 깨어 있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연결은 탈룰라를 대도시의 유령이자 타자로만 재현하지 않는 이야기도 가능케 해줄 것이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